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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비닐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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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비닐봉투
  • 전민일보
  • 승인 2015.11.12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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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거나 철물점에서 나사못을 몇 개 사더라도 으레히 검정비닐봉투에 담아준다. 이뿐이 아니다. 노점에서 야채를 한 주먹 사거나 약국에서 하다못해 파스를 하나 사더라도 검정비닐봉투가 등장한다.

봄날 호젓한 들길을 걷다가 길섶에 쑥이 올라온 것을 보고 쑥을 뜯은 경험이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담을 것이 없어 주변을 살피면 누군가가 새참 싸왔던 검정비닐봉투를 논두렁한 쪽에 돌로 친절하게 눌러 놓고 간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검정비닐봉투는 쑥을 담을 수 있는 바구니 대역을 잘 해 낸다. 환경보호라는 명분으로 비닐봉투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여 대형마트에 가면 검정비닐봉투를 구경할 수 없다.

그러나 재래시장에서는 여전히 검정비닐봉투를 많이 사용한다. 어물전에 들러 생선을 사면 적어도 비닐봉투 두세 장으로 겹겹이 싸고 묶어서 준다.

생선에 있는 물기와 비린내를 최대로 단속하기 위한 배려이다. 옷 가게에서 옷을 사면 고급스러운 쇼핑백 대신 역시 검정비닐봉투에 담아 준다.

그래서 재래시장에서 물건 몇개 사고 나면 누구든 양 손에 든 검정비닐봉투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처럼 풍성해 보인다. 게다가 서로 몸을 비벼대며 속삭거리는 소리는 발걸음을 신나게 한다. 검정비닐봉투 용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점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시던 酒客이 생각보다 배가 빨리 불러 올라치면 미처 마시지 못한 것을 검정비닐봉투에 담아 간다. 이 때 酒客이 휘청거리며 걷는 귀갓길을 검정비닐봉투가 파리를 불러 동행한다.

파리가 맛을 느끼는 곳은 입이 아니라 발바닥이다. 파리는 앞발로 냄새와 맛을 느낀다. 우리가 몸을 지탱하거나 걸음을 걸을 때 사용하는 발바닥을 파리는 맛을 느끼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다보니 검정비닐봉투 용도가 불쑥하나 더 떠올랐다.

큰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 학교 체육관에서 졸업식을 하였다. 이 때 신발을 신은 채 검정비닐봉투로 신발을 감싸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검정비닐봉투가 신발싸개로 변신한 것이다.

검정비닐봉투 사용처 종점은 어디일까. 야구경기를 관람하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머리에 비닐봉투를 뒤집어 쓴다.

봉투가 작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지만 머리를 우리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시장에 가면 빼놓지 않고 들리신 곳이 비닐봉투 가게이다. 100장 단위가 한 묶음인 검정비닐봉투는 크기에 따라 값도 차이가 있다.

어머니는 크기별로 서로 다른 두 세 종류 검정비닐봉투를 사다 텃밭에 있는 농막에 보관하신다. 그리고 텃밭에서 자라는 야채를 오가는 마을 사람이나 이웃에게 검정비닐봉투에 담아 건네주신다.

어머니께서 야채를 싸 주신 검정비닐봉투는 빈 봉투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야채를 받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기르지 않는 옥수수나 호박을 담아 되가져오기 때문이다. 때로는 검정비닐봉투에 담겨 시내에 사는 두 처형 집으로 간 야채가 참외나 토마토로 변신해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렇듯 검정비닐봉투는그런저런 물건을 담는 하찮고 싸디싼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텃밭에 흔하게 자란 야채를 담는 봉투에 머물지 않고 정을 담아 나르는 ‘정 택배사’이다.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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