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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는 부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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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는 부활할 것인가
  • 전민일보
  • 승인 2015.11.1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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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괄목할만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새로 밝혀진 목관 장식 유물을 통해 전북 익산 쌍릉에 백제 무왕과 나란히 잠든 여인은 미륵사지 서쪽 석탑 사리봉안기에 등장하는 사택왕후가 아님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쌍릉 소왕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학계에서는 이번 연구로 설화 속 인물로 전락할 뻔한 선화공주가 다시 역사 무대로 올라올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향가 서동요는 맛동이와 선화공주의 로맨스로 널리 알려졌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문 선생님으로부터 서동요를 배웠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맛둥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마를 캐어 팔던 백제의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로맨스가 가능했을까 깊은 의문이 생겼다. 서동은 그 머나먼 이국 서라벌에 가서 어떻게 공주를 아내로 데려올 수 있었을까? 선화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백제에까지 그 미모가 알려졌을까? 더구나 신라와 백제는 끊임없이 국경분쟁을 벌여온 적대국의 관계 아니었던가. 맛동이는 선화공주가 가져온 금은보물로 세력을 길러 왕자의 신분을 회복하고 왕으로 즉위하여 무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자들은 출처가 알려지지 않은 금동유물을 전북 익산 쌍릉 소왕묘에서 출토된 ‘금동 밑동쇠’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제강점기시대 촬영한 사진과 당시 작성된 유물 목록을 확인한 결과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 밑동쇠와 딱 들어맞는 소왕묘 출토 ‘금동널 꾸미개’를 찾아냈으며, 이것이 백제 무왕이 묻힌 대왕묘 널꾸미개에 비해 문양과 제작기법에서 시기적으로 더 앞선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왕비가 묻힌 소왕묘가 무왕의 대왕묘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이는 무왕과 함께 쌍릉에 묻힌 왕비가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사택왕후가 아님을 의미한다. 왕후가 왕보다 나중에 죽었는데, 묘가 먼저 만들어질수 없기 때문이다.

금제사리봉안기는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석탑 해체공사 중에 발굴되었는데,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절을 세우고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글이 새겨있다.

고려사 지리지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익산 쌍릉에 묻힌 인물이 무왕과 왕후라고 적혀있다. 이병호 학예관은 7세기 전반에 죽은 무왕의 또 다른 왕비였던 선화공주가 묻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라건대, 역사학자들은 더 치밀하게 국내외 유물, 유적과 문적들을 연구하여 선화공주를 신화가 아닌 실존인물로 확인시켜 주었으면 한다. 일연이 적어놓은 역사적인 로맨스가 사실로 확인되고 이를 토대로 많은 문학, 예술 작품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던 선화공주의 그림 한쪽이라도 남았으면 오죽 좋을까?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은 선화공주의 아들이었는지, 사택왕후의 자식이었는지도 궁금하다. 오래전 역사를 거슬러 상상해보는 것도 즐겁다. 더구나 5천년 우리 역사에 몇 번 안 되는 로맨스임에랴.

선화공주는 사택왕후의 미륵사탑 사리봉안기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더욱 화려하고 장엄하게 부활할 것으로 믿는다. 쌍릉 소왕묘에서 출토된 금동 밑동쇠와 금동 널꾸미개에 대한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김현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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