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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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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의 보고
  • 전민일보
  • 승인 2014.07.0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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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농촌지도사

 
정조(正祖)는 한국사에서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은 물론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이복동생에게 보여준 그의 눈물겨운 우애는 범인(凡人)의 수준이 아니다.

동생을 죽이라는 신하들에게 그는 3일간 단식으로 맞선다. 그 어떤 왕도 하지 못한 일이다.

또한 백성에겐 한 없이 인자했고 앎에 있어서는 신하들을 압도했다. 플라톤(Plato)이 얘기한 철인군주(哲人君主)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만일 이런 영명한 아들을 남기지 않았다면 ‘살인과 광기에 가득한 미치광이’라는 멍에를 벗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의 악행에 대한 기록을 지워나갔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효(孝)였다. 하지만 삭제한 사실 자체는 그것대로 남김으로써 역사에 남겨야할 몫을 잊지 않았다. 그는 또한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정조가 예외로 인정해 준 인물이 있다. 바로 서얼 출신 박제가(朴齊家)다. 정조는 박제가에게 깊은 배려를 했건만 성격 급한 신하는 어진 왕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박제가는 정조를 향해 자신도 고을 수령으로 임명해달라고 청한다.

조선시대 수령은 사실상 그 지역의 왕이었다. 또한 재상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하는 직책이기도 했다. 박제가는 정조를 향해 이런 시까지 지어가며 하극상의 모습을 보인다. “나는 전생에 늙고 둔한 말이었을 거야. 날마다 채찍을 맞고 300근을 나르고 있으니..” 여기서 말인 박제가에게 날마다 채찍을 치는 나쁜 주인은 바로 정조다.

박제가는 이 시를 주변에 돌린다. 정조는 섭섭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1792년 박제가를 부여현감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목민관으로 나간 박제가에게 정조가 우려했던 현실이 닥치게 된다. 암행어사에게 걸려 정조에게 파면대상으로 보고 된 것이다. 가뭄에 대한 미숙한 대처와 세금독촉 방식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 문제가 됐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정조가 얼마나 어진 임금인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정조는 암행어사의 보고를 받고 이렇게 얘기한다. “힘 있는 수령은 봐주고 힘없고 배경없는 박제가 같은 사람만 잡았구나.”사실 박제가의 죄목이라는 것이 업무의 미숙을 문제 삼을 수는 있을지언정 파면까지 할 사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조는 일단 암행어사의 보고를 존중해 박제가를 파면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조는 얼마 있지 않아 박제가를 영평현령으로 임명한다. 이전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박제가는 이번엔 유능하고 덕망 는 수령으로 변신한다. 박제가가 이때 한 일 중에는 종두법을 개발하고 시술한 것도 있다.

정조는 강자에겐 강했지만 약자에겐 너그러운 왕이었다. 노론의 거두 심환지(沈煥之)와 박제가 사이에 문제가 생기자 정조는 심환지를 향해 이렇게 애기했다고 한다. “그대가 좀 참으세요.” 명문가와 고관대작이 아니라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서얼출신 박제가 편이 돼준 임금.

암행어사의 보고를 존중하면서도 ‘강자는 손도 못 대고 애꿎은 약자만 희생양으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칠 수 있는 제왕. 개인은 물론 조직도 힘없고 배경없다는 평가를 받는 순간 여러모로 고달픈 것은 그저 옛 말일까.

‘암행어사로 나갔으니 왕에게 보고할 건수는 만들어야겠고 그렇다고 힘 있는 사람 잘못 건드려서 후환을 만들 수는 없으니 뒤탈 없을 몇 명 희생양으로 만들면 되겠구나.’

실제 정약용(丁若鏞)은 암행어사로 나가 보고한 것이 문제가 돼 끝내 폐족(廢族)이 되고 만다. 암행어사의 보고를 꿰뚫는 정조의 통찰력은 이 시대 지도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덕목이다.

조지 와싱턴과 로베스 피에르가 세계사의 변혁중심에 자리하던 그 시기, 우리에겐 정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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