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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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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나무 아래서
  • 전민일보
  • 승인 2014.06.1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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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미 전북문화관광해설사/행촌수필문학회장
 

출근을 하자마자 옆에 앉는 제니가 앵두 한 접시를 내민다. 집에서 따왔다고 했다. 붉게 잘 익은데다 알까지 굵어 입에서 오물오물 씨를 발라내고도 제법 먹잘 게 있다. 새콤달콤한 맛 또한 그만이다. 그 옛날 우물가에 있던 우리 집 앵두 맛도 이랬지. 아니, 신맛보다 단맛이 강한데다 색깔 또한 하얘서 사람 눈을 크게 끌지는 않았지. 추억을 떠올리며 10여 년 전에 썼던 <앵두나무 아래서>를 옮겨본다.

대문을 열자 하얀 앵두꽃이 반긴다. 온종일 남녘에서 물리도록 보고 온 꽃이건만 길가에서 보아온 꽃들과는 다른 다소곳함이 사랑스러워 그 옆에 섰다. 맵던 바람결에 조그맣던 봉우리가 햇빛 고와지자 눈부시게 피어났다. 이 고운 자태 소리 없이 사라지면 쌀알만 하던 열매 콩나물 콩 만하게, 다시 메주콩만 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맺히겠지. 익는 구분 애매한 흰 앵두지만 같이 살며 지켜본 세월에 윤기 나는 정도로 금방 알 수 있는 앵두나무는 깊은 우물 옆에 서 있었다. 몇 번의 집수리를 하면서 우물은 메우고, 앵두나무는 베어버렸는데 다시 햇가지가 돋아 열매까지 맺으니 그 나무로 생각되어 결혼하던 해 일들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처음 인사를 왔던 날 시어머님은 앵두나무 옆에 서 계시다가 “어서 오너라.” 한 말씀만 하셨다. 그이와 시어머니, 일 보는 애, 그 옆의 꼬마, 앵두꽃이 어울려 모두가 하얗게 보이는 봄날이었다. 그 봄에 결혼을 하고 신방으로 꾸며질 방이, 세사는 사람들의 이사가 늦어져 임시로 머문 방은 창문 열면 바로 눈앞에 앵두나무가 보였다. 콩나물 콩만 한 연둣빛 앵두가 달려있었다. 피난 짐 같은 혼수 보따리는 거실에 가득 쌓여있고, 주문해 놓은 가구점에서는 언제 들이겠느냐고 독촉이 심했다. 옆방 사람들은 대문만 드나들 뿐 말이 없었다. 

앵두가 메주콩만 한 우유 색깔로 변해 가는 무렵에야 신방이 꾸며졌다. 길지는 않았지만, 신방으로 들기까지 지루했던 그 기간 앵두나무를 보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어느새 초록 잎 사이사이 빼곡히 박힌 앵두가 진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옆의 빨간 보리수 열매와 함께 따서 큰 유리항아리에 술을 담가 광으로 옮겼다. 해마다 담근 술이 반쯤, 혹은 가득 담겨 있는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런 어느 날 두 오빠가 오신다는 연락이 왔다. 외출준비를 하시던 꼼꼼한 시어머님은 기어이 당신 손으로 오빠들이 드실 술까지 주전자에 담아놓고 나가셨다. 아버지 같은 오빠들은 막내 동생 사는 모습이 그런대로 안심이 되는지 기분 좋은 모습으로 주거니 받거니 술은 금방 바닥이 났다. 한 주전자, 두 주전자……. 줄어든 표시가 확 나는 술 항아리. 어떡하나? 나무라시지는 않겠지만, 오빠들을 술꾼으로 알면 어쩌나? 헤픈 며느리로 알면 어쩌나. 그보다는  분명 어머니 몫인 광 열쇠! 

끼니때마다 필요만큼의 쌀과 부식을 내주고 문에는 항상 자물쇠를 잠그는 어머님 의 광에 몇 번을 드나들었는가? 더럭 겁이 나서 생각해낸 것이 큰 바가지에 물을 받아 설탕을 한 움큼 넣고 저어 술항아리에 붓는 것이었다. 진분홍에서 연분홍색의 술이 되었다. 광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열쇠는 제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한참 뒤, 술이 필요한 때에야 부패한 술 항아리를 발견하고 원인을 궁금해하셨지만 얌전한 며느리로 자리 매김 해가는 나를 의심하는 빛은 조금도 없으셨다. 어머님 돌아가신지 10년이 넘었다. 지금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앵두 술을 담근다. 그때 어머님은 정말 술이 부패한 원인을 모르셨을까. 여전한 궁금함으로 뽀얀 꽃 곱게 핀 앵두나무 아래서 고개를 갸웃대본다.
본인 수필집<그 사람>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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