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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인터뷰 "다시는 이 같은 비극 발생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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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인터뷰 "다시는 이 같은 비극 발생하면 안 돼"
  • 임충식
  • 승인 2012.06.2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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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당시 전주 신흥고등학교 2학년이던 이천수 옹(82)은 군에 입대했다. 6.25 전쟁 발발로 모두가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나라를 위해 싸워야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됐고, 이 옹도 그 뜻을 같이했다.


전쟁 참여를 결심한 같은 학년 친구 240명은 인근 전주고등학교에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은 후, 이리농림학교(현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서 제식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받는 과정도 녹록치 않았다. 훈련 중 이리역(현 익산역)이 폭격 당하자, 학생들은 바로 기차를 이용해 대구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구농림학교(현 경북대학교)에 도착한 이들은 이틀 간 총 장전과 방아쇠 당기는 법만 배우고 바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다. 이 옹은 “총이 우리들의 키와 엇비슷했다”며 “들기조차 버거운 총을 들고 우리는 전투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낙동강은 우리 군에게 반드시 지켜야할 저지선이었고, 인민군에게는 반드시 함락해야 할 돌파선이었다. 이 옹은 그 전투에서 수많은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 옹은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속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며 “친구들의 죽음을 수차례 목격했는데 아직도 생생하고, 끔찍하다”고 말했다.

전투 중 포로로 잡힌 이 옹은 이동 중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 옹은 “떨어지고 한참 후 눈을 떴고, 다행히 살아있었다”며 “무작정 남쪽으로 향해 걷고, 또 걸었다”고 말했다. 이어 “밤새 걷다보니 포항이었고, 포항에서 군인들이 경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주로 또 걸었다”고 말했다.

어렵게 국군에 합류한 이 옹은 7사단에 배속, 기계·안강 전투에 투입됐다. 밀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됐고 마침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국군은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전투에 지친 이들이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쉽지 많은 않았다.

이 옹은 “도보로 며칠을 이동했는데 걸으면서 꿈도 꿨다”며 “지금의 세대들은 걸으면서 꿈을 꿨다고 하면 믿질 못한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평양까지 올라간 이 옹은 중공군과 또 한 번 힘겨운 전투를 치러내야만 했고, 오랜 전투 끝에 한반도에는 38선이 그어졌다. 추후에 후방으로 배치된 이 옹은 그곳에서 제대할 수 있었다. 5년 7개월만의 제대였다.

제대 후 신흥고에서는 이 옹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고, 이 옹은 신학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 옹은 “교장선생님이 전쟁 당시 학생들이 보내온 전선일기를 복도에 전시해놨었다고 했다”며 “잊지 않아준 것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19일, 이 옹에게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육군이 참전용사에 대한 명패를 제작해 신흥중·고등학교에 전달했고, 71명의 이름이 새겨진 이 명패에는 이천수 옹의 이름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이 옹은 “나에게 청춘은 없다”며 “청소년기, 사춘기 시절이라고 불리는 나이 때에 나는 총을 잡아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전쟁의 충격은 오래갔고, 국방색만 봐도 보기가 싫을 정도였다”며 “6.25는 나라에서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민족의 비극이었다”고 소회했다. 이 옹은 또 “어느 누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생각만 났다”며 “그것은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윤가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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