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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반역자, 어찌 잊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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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반역자, 어찌 잊을쏘냐
  • 전민일보
  • 승인 2011.03.14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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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가담한 이두황 묘 가보니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일본 낭인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 사건으로 당시 이 살인사건에 조선인들도 끼어 있었다.
그 중 한명이 이두황으로 이 자의 묘가 최근 전주 기린봉에 터를 잡은 것으로 확인돼 찾아가 봤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이종진 교수와 함께 11일 찾은 이두황의 무덤은 찾기 힘들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쉽게 발견됐다.
전주 기린봉 인근에 터를 잡은 이두황의 묘는 등산길 바로 옆에 있었고 비석높이만 2m, 관리 또한 잡초가 하나 없을 정도로 잘 돼 있었다.
비석에는 이두황에 대한 설명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정확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 교수는 "탁본을 떠서 내용을 알아봐야 정확하게 알 것 같다"며 "후손이나 친일 관련자 들의 이름이 묘비에 적혀 있었던 것 같지만 모두 삭제된 상태다"고 말했다.
이어 "광복 직후 친일파 대부분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이두황은 화장을 해 묻어 불가능했다"며 "육체가 그대로 있으면 후손에게까지 해를 입히고, 화장하면 그 화가 소멸한다고 믿어 화장을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이 묘비를 보면 후손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깎아내는 등 우리의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현실이다"고 지적했다.
그는 "본인이 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조상·선조라 생각하고 감추거나 숨기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이 교수는 "독립 운동가는 칭찬·추앙받고 어두운 과거의 역사는 다시한번 되새겨보고 돌아볼 수 있도록 이대로 보존해야 한다"며 "복수심에 이두황의 묘를 파훼치는 등 훼손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에 따르면 이두황은 1858년(철종 9)∼1916년 민족반역자로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 친군좌영초관(親軍左營哨官)을 시작으로 수문장 등의 무관직을 거쳐 1889년 흥해군수를 지냈다.
그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으로서 동학군과 많은 전투를 하였고, 1894년 11월 8~14일 동학농민군과 친일관군의 최대 격전지인 우금치에서 대학살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맹활약한다.
또한 이두황은 1895년 훈련대 제2대 대장으로 민비시해에 가담해 광화문경비를 담당했다가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일본으로 망명, 1907년 특사가 돼 귀국했다.
친일파를 부식하려는 이토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가 됐고, 곧 의병투쟁이 치열하던 전라북도의 관찰사 겸 재판소판사로 임명받아 영화와 천수를 누리다 전라북도 장으로 장중히 엄수됐다고 한다.이석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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