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폭이 전주 삼천천의 그것과 비슷하다. 약 50m~100m 안밖으로 매우 좁다.
현재는 중국의 도문 시와 북조선의 남양시가 개천 하나로 국경선을 두르고 있었다. 수심도 그리 깊어 보이지 않는 개울 너머에는 안개가 민가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두만강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에게는 ‘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건너야 했던 통곡의 강’이자, ‘조국을 되찾기 위해 칼을 품고 건넜던 결연한 강’이었다.
1890년대 그 당시의 정경이 뇌리를 스친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수비대의 불빛이/아물거려 쏘아보는데/지친 몸을 이끌고 갔을까.......
검은 귀신같은 산들이/국경을 둘러싸고/얼어붙은 두만강은/숨을 죽이고 누워 있다.’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의 밤> 부분
국경의 도문시 강변공원에서는 중국의 남녀노소가 특유의 건강 체조를 하고 있었고 우리 한국인들은 두만강 건너의 땅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름에 싸여 김정구가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을 흥얼거린다. 우리는 강변을 따라 걸으며 강 너머에 눈을 고정시켰다. 육안으로 파노라마 사진을 찍듯이, 그것도 초소까지 뿐.
그리고는 삼삼오오 사진을 찍었다. 우리 동창들은 “00초교 11회,ㅎ씨 모여라”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고희가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거리낌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 반 친구이자 친척 여덟 명이 함께한 종친회 여행이었으므로 아량에 기대어.
시름은 깔깔거리는 소리에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이곳은 봉오동전투 격전지에서 7~10km 떨어진 곳, 자연스레 100여 년 전의 현장이 떠오른다. 역사책에서만 읽었던 그 현장이 지척이라니. 1919년 용정 3·13 만세 평화시위가 총칼로 짓밟히자 그들은 무력 독립 투쟁 길에 오른다.
이주민의 호주머니에서 군자금이 나오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 동생들을 사투의 현장으로 배웅했다.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그 길로 보내야 했다.
필수적인 군자금이 모금되었으니 50만원이라는 거금. 당시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 한 정이 약 30원~40원이었으니 50만 원이면 소총 12,500정 이상을 살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북간도 독립군 전체를 서구식 정예 부대로 무장시키고도 남는 돈이었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망국 백성들에게 희망이고 등대가 되었다. 한 독립운동사가는 이렇게 썼다. ‘봉오동전투는 민초들의 나라사랑이 핏빛으로 피어난 꽃’이라고.
황숙 피천득기념사업회 이사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