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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나랏말씀’과 ‘나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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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나랏말씀’과 ‘나라님’
  • 전민일보
  • 승인 2014.12.04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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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길섶 문화비평가

 
“나랏말씀이 중국말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쉽게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훈민정음 서문의 첫 문장이다. 세종, 참으로 대단한 임금이다. 백성의 뜻을 듣기 위해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버렸다. 언로에 있어 직접민주주의 실천의 백미라 할만 하다.

백성의 뜻을, 백성이 직접 쓴 글을 통해 직접 듣겠다는 발상이 곧 직접민주주의 아닌가. 당시 백성들에 있어서 한자는 일정정도 대의적 문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기능마저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으니 문자생활의 새판을 짠 거 아닌가. 15세기 중반의 일이다.

때는 바야흐로 21세기에 이르렀고, 민주주의라는 말을 신물나도록 듣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정신인 직접민주주의는 내팽겨쳐지고 있다. 나랏말씀이 중국말과 달라서가 아니다. 나라님과 달라서이다. 당초 나라님은 백성들이 즐겨쓰는 나랏말씀을 모르시는 것 같다. 사연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랏말씀이 나라님과 달라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열불난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눈꼽만치도 펴지 못하는 사람이 쌔고 쌨느니라.

백성들이 열불나는 것은 나랏말씀이 나라님과 달라서가 아니라 나라님이 나랏말씀과 달라서이다. 나라님의 말씀이다. “조금만 확인해보면 금방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의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큰 문제다.”

그럴까. 궁궐문 다 걸어 잠궈놓다시피 하면서, 누구에게 확인하라는 것일까. 궁궐문 다 열어놓았다 하더라도 조금만 확인해보면 금방 사실 여부를 다 알 수 있을까. 정보공개가 그렇게 잘되고 있는가. 그 ‘조금만’이란게 당사자에게 기냐 아니냐 물어 기다고 하면 기고 아니다 하면 아닌 것인가. 세상 참 편하다. 기자질 참 편하게 하라는 세상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어찌나 어리석은지 세상 그렇게 편하게 살지 않는다.

백성들은 나라님의 언어를 ‘유체이탈 화법’이라 칭한다. 요새들어 상왕 노릇하려는 전임자도 즐겨 썼던 화법이다. 옛날의 궁궐은 틀어 잠그면 임금님 귀는 꽉 막혔겠지만 지금 세상은 어디 그런가. 클릭 몇 번만 하면 백성들의 나랏말씀을 다 알 수 있다. 클릭 몇 번만 해보면 금방 나랏말씀을 알 수 있는 것을 클릭조차 하지 않고 어리석다고 몰아가는 것은 큰 문제다. 아니면 수도 없이 클릭하면서도 모른 체 하는 유체이탈 화법의 비밀일까.

이 세상은 사실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판타지가 세상에 거처하여 사람들을 홀리는 까닭이다. 이 세상은 천지가 거짓말 투성이다. 성선설이 있는 까닭이다. 말이란 게 애초부터 화자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청자가 있는 까닭이다. 말에는 거짓말이 있듯 그 거짓말을 위태롭게 하는 촉이 청자에게는 있다. 사실이건 아니건 그러하다고 믿는 순간부터 비밀이란 없다. 진실은 믿음에서 생기지 까발려져서 생기는 게 아니다. 진실이 늘상 거짓에 가리워지기 때문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어리석은 백성들도 다 아는 세상에, 이런 세상의 이치를 모를 리 없다. 나라님이 나랏말씀을 좇아가면 된다. 쫓아내지 말고. 그리하여, 조금만 확인해보면 다 알 수 있다. 그렇게 가려내면 될 일이고, 백성들이 듣고 싶은 것은, 28자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에게 던진 세종의 말이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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