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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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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발자국
  • 전민일보
  • 승인 2022.01.18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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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서 만난 빈 벤치가 반갑다.

최근 한파가 몰아치고 곳곳에 눈 사고도 잦았다. 외출을 삼가라는 말대로 나는 주말에 집에만 있었다. 베란다의 물통의 물이 얼고 화분 받침대의 물도 얼었다.

집 주위를 돌거나 실내 계단 걷기로 운동을 대신하기도 했다. 소나무 숲속에서 건너편 산 너머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축복인가. 먼 길에서 자동차들의 소음도 정답게 들린다.

다시 걷는다. 만덕정으로 내려가는 길을 제치고 마제봉 정상으로 가는 능선 길을 편안하게 걸어본다. 소나무에서 가끔 떨어지는 눈가루가 나에게 말이라도 걸어오는 듯하다.

날이 추운 뒤에라야 소나무가 푸른 것을 안다지만 겨울의 소나무 잎은 힘들어 보인다. 잎에 쌓인 적설이 솜뭉치처럼 따뜻하게 보인다. 둥치의 옆구리에서 두꺼운 껍질을 뚫고 나온 바늘잎이 날카롭다. 바늘 끝의 정기에서 상큼한 정기를 느낀다.

건너편 계곡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한다. 낯선 길의 발자국에서 온기마저 느껴진다. 서산대사의 시를 떠올린다.

눈 내린 들판을 걸을 때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답설야중거 踏雪野中去불수호란행 不須胡亂行금일아행적 今日我行跡수작후인정 遂作後人程)

사람은 때때로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다. 골이 진 계곡의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서 산 능선으로 오른다. 산마루에 오르면 체육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앞선 발자국이 이정표이니까 안심이다. 오히려 조용한 산길을 누군가와 같이 걷는 것 같다. 혼자이지만 숲에 오면 함께 있는 풍성함이 있다. 홀로이지만 함께하는 행복이 있다.

시장기를 느껴야 밥맛이 좋듯이 외로운 시간은 오롯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시장기 같은 것일 터. 숲의 나무가 그렇듯 나도 한 그루의 나무처럼 숲 일부분이 된다.

비탈길을 숨 가쁘게 올랐다. 등으로 느껴지는 후끈한 열로 이마에 땀이 솟는다. 발자국이 많이 난 걸 보면 이쪽으로도 벌써 다녀간 사람이 많다. 마침 마루에 올랐는데 건너편으로 내려가는 길은 없었다. 가파른 경사여서 철망을 쳐놓았다.

봉우리 쪽으로 오르는 길만 보인다. 모퉁이만 돌아보면 어떤 길이 나올까 기대와 호기심이 인다. 정상 밑 마루에 오르니 오랜만에 벤치 하나가 외로이 나를 맞이한다. 땀을 식히며 숨을 골랐다. 건너편 마을과 먼 산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겨울 나목들도 빈 몸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있는지, 마른 가지에 햇살이 다복하다.

벌써 한 시간 남짓 걸은 것 같다. 이 정도면 꽤 많이 걸었다. 정상을 돌아 내려가면 틀림없이 저수지 길로 이어질 것 같지만, 시간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그만 해야할 것 같다.

오던 길로 내려가는 길은 재미없지만, 또 오르면서 몰랐던 풍경을 보리니, 내려가기로 했다. 해는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오던 길이라 쉽다. 더 높이 오르고 싶은 마음과 새 길을 탐색하는 분주한 마음마저 내려놓으니 오히려 한가롭다.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더 많이 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법이다. 이런 욕망의 부스러기가 삶의 성취보다 상처를 만들기 쉬운 때가 아닌가 싶다.

내 인생길도 내려가는 여정에 놓여 있다. 하지만 생이 있는 동안 배움은 끝이 없기에 마무리의 방법도 익히면서 할 일이다.

내 남은 생이 얼마일지를 생각하면 조급함이 일어 괜스레 마음만 바빠지는 때가 잦다. 어떤 작은 길이든 새로운 통로를 여는 길로 만들고 싶다.

내 삶의 발자취가 뒤에 오는 어떤 이에게는 안도의 발자국이 될 수도 있을 터인즉.

오를 때 스친 작은 봉우리가 옆으로 나 있다. 작은 동산이지만 편편한 봉우리의 좋은 소나무와 나란히 동무하고 싶다. 아무 발자국도 없는 새하얀 평원이다. 신천지를 개척하는 즐거움이 이런 거와 비슷하리라.

쌓인 눈에 발등과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키 큰 소나무가 반갑다고 잎을 나부낀다. 다섯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서 일가족 같이 보인다. 곁의 소나무가 무덤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무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만덕정 방향인데, 살펴보니 가파른 절벽이다. 들어온 길 입구까지 되돌아 나와서 숨을 고른다. 자유로운 영혼의 아늑함이라니! 일상과 호기심을 사랑할 일, 그리고 좋은 마무리가 있을 뿐.

아차! 마지막 벤치에 와서야 깔개를 놓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5분도 걸리지 않았던 시간인데 되돌아가는 시간은 몹시 길고 힘들었다. 걸어왔던 인생길에서도 얼마나 많은 실수와 놓친 것들이 많았을까. 헛걸음과 뒷걸음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가기도 했으리라. 계곡물이 흐르다가 여울도 만나고 바위틈을 비집고 빠져나가 편안한 소에서 쉬기도 하면서 다음을 준비했듯이.

앞선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새로운 길도 열 수가 있었지 싶다. 앞의 발자국을 그대로 답습만 하려 들지 않는 것이 또한 사람의 길이다. 누구도 밟지 않았던 길의 모험을 감당하는 일은 지루한 일상을 감당하는 동력이 된다.

살면서 남긴 내 발자취는 누군가의 눈길이라도 될 만한 것이 있을까. 발자국을 내준 앞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도 밟을 수가 있었다. 다음 사람의 이정표가 될 만한 발자국이 아니라면 함부로 만들지는 말 일이다.

가볍다. 평지에 내려오니 그 어지러운 흙탕길도 즐겁다. 세상사는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 저녁 찬을 준비하려는 마을사람들의 발자국이 마트로 이어지고 있다. 나도 마을 사람들 따라 그쪽으로 발길이 돌려진다.

조윤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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