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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일보
  • 승인 2016.02.1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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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을 평가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생전에 그가 이룬 업적, 사회에 대한 공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히 죽음을 앞두고 꾸준히 실천한 봉사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오래전 영국 런던의 캔터베리 성당에 니콜라이라는 관리인이 살았다. 그는 열일곱 살에 성당을 관리하는 집사가 되어 평생동안 성당 청소와 잔일을 했다. 그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성당의 종탑에 걸린 종을 쳤다. 얼마나 정확한 시간에 종을 쳤는지 런던 시민들은 자신의 시계를 니콜라이 집사의 종소리에 맞추었다고 전해온다.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된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치기 일을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자신은 끝까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는 76살까지 종을 치며 성당의 관리를 도맡아 하였다. 그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족들이 모여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종을 칠 시간이 되자 니콜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더니 밖으로 나가 종을 쳤다. 종을 친 뒤 종 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왕실의 묘지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귀족으로 대우해주었으며,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모든 가게, 심지어 유흥주점까지 문을 열지 않자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런던의 공휴일이 되었다.

몇 년 전 영국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현존하는 영국인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선발된 20명 중 세 번째로 뽑힌 사람은 케임브리지에서 굴뚝 청소를 하는 ‘칸나 할아버지’였다. 칸나는 우리나라에서 홍초라고도 불리는 잎이 넓고 꽃이 붉거나 노랗게 피는 아름다운 꽃이다.

칸나 할아버지는 집이 없어서 남의 집 창고 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세 들어 살았다. 부인과 자식도 없는 독거노인이었다. 그는 칸나를 기르는 취미가 있었는데, 다락방에서 칸나를 기를 수 없었다.

시장을 찾아가 공원에 칸나를 심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칸나를 기르고 변종을 만들어 가꾸기를 십여 년 만에 그는 칸나페스티벌을 열게 되었다. 케임브리지의 칸나 축제는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꽃 축제가 되었고, 전 유럽에 걸쳐 그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칸나 할아버지는 물질에 관심이 없었고 뜻있고 보람되게 사느냐에 삶의 가치를 두었다.

그는 굴뚝 청소에도 충실하여 12개의 굴뚝 청소 특허를 딸 정도로 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칸나 할아버지 말고는 이름마저 전해오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일생을 살았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사람들이 없을까? 있었다 하더라도 왜 전해오지 않을까? 모르고 있지만, 지금 어디선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을 고귀하게 평가하지 않는 풍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큰일을 하는 큰 인물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그래서 세상은 시시해졌다. 누구나 얼마 동안은 성실하게 살 수 있고, 세상에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을때까지 그러기는 쉽지 않다. 큰 것을 작게 보고 사소한 헌신에 정성을 다해야 하려니 싶다.

김현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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