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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초 김부용과 김이양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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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초 김부용과 김이양의 사랑 이야기
  • 전민일보
  • 승인 2023.01.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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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삼대시기(三代詩妓)로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 성천의 운초 김부용(雲楚金芙蓉)을 꼽는다.

평안도 성천(成川)의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부용은 네 살 때 글을 배우고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조실부모 하고 줄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퇴기(退妓)의 수양딸로 들어간 것이 부용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부용이 기생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가혹한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총명뿐이요, 노기(老妓)의 그늘 아래 의지하게 되었으니 기적(妓籍)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열두 살에 성천의 관기(官妓)가 된 부용은 시문(詩文)과 노래와 춤에 뛰어나고 얼굴이 고와서 금방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내로라하는 풍류객들이 부용을 만나고 싶어 줄을 섰고, 수령들은 부용만을 끼고 도니 동기들의 시샘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많은 남정네들의 유혹에 곤혹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우쭐해서 천하의 명기임을 자부할 만도 한데, 어쩐지 부용은 자신의 처지가 외롭고 서럽기만 하여 한탄의 시를 많이 썼다고 한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부용의 나이 열아홉이 되었다. 그때 부용의 운명을 다시 바꿔놓은 신임 사또가 부임해 왔다. 그는 정사에만 열중하는 명관이었으나 부용의 용모와 재주, 시문에 찬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직속상관에게 부임인사를 가면서 부용을 데리고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을 찾아갔다. 그들은 사제지간 이었으므로 김이양은 제자를 위해 대동강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부용은 김이양을 처음 만났는데 그의 나이 일흔 일곱 살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나이 쉰여덟 살 차이였다.

김이양은 안동 김씨로 함경도 관찰사, 이조ㆍ병조ㆍ호조판서 지충주부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여 부용은 일찍이 그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다 평양에 머물면서 김 대감을 잘 모시라는 신임 사또의 명을 받으니 아주 기뻤다.

그러나 김이양은 점잖게 대했다. 부용은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이양도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여 사양했지만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부용 또한 연만한 대감을 공양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두 사람은 열병같은 사랑은 아닐지라도 신뢰와 존경으로 대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시문으로 화답하며 지냈다.

부용에게 김이양과의 만남은 생활면이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타고난 시적 재능을 더욱 고양시키는 데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기회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뜨거운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관직에 매인 김이양이 호조판서에 제수되어 한양으로 가게 되었다. 부용은 열 살때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보다 더 처량했다. 그런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어 양인의 신분으로 격상해 주었다. 그리고 정식 부실(副室)로 삼아 훗날 만날 것을 기약하고 한양으로 떠나버렸다. 마음과 마음을 합하면 하늘 끝이라도 날아갈 줄 알았는데, 마음을 합쳐서 고통의 씨앗만 뿌려놓은 셈이었다.

이별의 고통을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부용은 피를 토하듯 시를 써서 김이양에게 보냈다. 이 시가 부용이 남긴 아름다운 보탑시(寶塔詩) 부용 상사곡(相思曲)이다.

부용의 간결한 부탑시에 감동한 김이양이 서울 남산 중턱에 집을 마련해 놓고 부용을 불렀다. 마침내 녹천당(祿泉堂)의 주인이 된 부용은 김이양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당시의 명사들과 시로 교류하니 시제에 감복한 그들은 ‘운초교서 운초여사’ 등의 존칭으로 경의를 표했다.

부용은 시제가 높아 남녀 차별, 신분 제약 등 사회적 질곡으로부터 한 차원 뛰어넘어 자신의 세계를 소유한 한 인간의 열망을 담아냈다. 김이양이 과거에 급제한지 60년이 되는 여든 아홉 살에 회방 잔
치가 열렸다. 그러나 부용과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 봄 김이양은 아흔두 살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부용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그 뒤 부용은 오로지 김이양 고인만을 그리워하며 16년을 더 살았다. 임종이 다가오자 “내가 죽거든 김 대감님이 묻힌 천안 광덕산 기슭에 묻어주오.”라는 유연을 남겼다. 부용의 소원대로 천안의 광덕산에 먼저 간 김이양의 묘 옆에 정갈한 무덤으로 남아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절개를 기려 그의 묘를 ‘초당마마의 묘'라고 불렀다.

한편 전국을 무대로 문화유적을 탐사하는 단체인 ‘우리문화유산사랑회’ 회원 40여명은 운초 초당마마의 묘를 찾아 나섰다. 충남 천안시 광덕산 광덕사 입구에는 ‘김부용의 묘’란 표지석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천안의 명물 호두, 호두나무 군락을 이룬 숲 사이, 가파른 길로 조금 오르면 초당마마의 묘를 만난다. ‘묘비는 시인 운초 김부용의 묘’라고 쓰여 있다. 우리 일행 40여명은 묘비 앞에 서서 운초의 시혼을 기렸다.

그런데 한 가지 민망스러운 일이 있었다. 수령이 몇 백 년이나 되는 소나무가 태풍 때문인지, 허리가 꺾인 채 하필이면 운초 묘소 한 가운데를 짓누르고 있었다. 바로 천안시청 문화관광부서로 전화를 했더니 곧바로 조치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부용은 주옥같은 삼백여 편의 애상적인 시와 문집으로 <운초 시> <부용집>이 있다. 이 책에 수록된 3백여 수의 시는 <규수문학> (閨秀文學)의 정수로 꼽힌다.

19세기 초엽 평안도 성천과 한양을 넘나들며 당대의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분의 귀천과 사회적 질곡을 뛰어넘어 한 인간으로서 한 세계를 지향한 시인 운초 김부용. 그의 결곡한 모습이 서글프지만 한편 아름답기도 하다.

고재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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