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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사람으로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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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사람으로 사는 일
  • 전민일보
  • 승인 2023.01.06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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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왔다. 부끄럽지만 몇 년째 같은 다짐만 반복한다. 첫째도 운동하기, 둘째도 운동하기다. 물론 틈만 나면 산책도 하고, 근처 산이라도 다니려고 하지만 정해둔 습관이 없기 때문에 늘 운동부족에 만성피로를 달고 산다.

습관이라는 것은 참 무서워서 한 번 몸에 배이기 시작하면 안하면 병이 나지만 그 정도로 습관을 만들기는 쉽지가 않다.

내가 책방의 한 손님에게 유독 관심이 갔던 건 그 분의 ‘습관’때문이었다. 화요일 오후 2시경이면 항상 나타나는 책 손님. 책을 고르는 안목이 좋았고, 책이야기를 나눌 때면 폭넓은 혜안에 배울 점이 많은 분이셨다. 그렇게 인연을 쌓던 중, 우연히 손님의 독서노트를 보게 된 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체하며, 한 권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정성, 그리고 읽은 책의 맨 앞장에는 책을 구입한 장소와 날짜, 그리고 읽기 전의 소감과 읽은 후의 소감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소감을 적을 때도 그냥 글만 적는 게 아니라 글에 어울리는 그림 스티커도 붙여서 책의 한 페이지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만들었다.

이건 보통의 책 사랑이 아니었다. 손님이 궁금해졌다. 나의 감탄사에 손님은 어릴 적부터 기록하고 꾸미는 일을 좋아해서 그저 ‘취미’일 뿐이라고 부끄러워했지만 나의 눈에는 취미를 넘어선 빛나는 일상이 보였다.

2019년 겨울, 손님에게 한 해 동안 읽은 책이 몇 권이냐고 물어보자 140여권이 된다는 얘길 들었다. 손님이 읽어낸 책들은 어떤 세상일까 궁금했고,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책들을 보여줄 수 있을지 여쭤보았다. 손님은 흔쾌히 허락했고 나는 책방의 작은 테이블을 손님의 책 테이블로 바꾸어 ‘책방손님의 서재전시’를 진행했다. 그게 2021년 1월이었다.

전시는 한 달간 진행이 되었고, 책방 앞에 동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현수막을 붙여서 동네 분들이 지나다가 들어오기도 하고 추운 겨울의 책방은 사람들의 훈훈한 발걸음이 더해졌다. 성공적이었다. 다들 손님의 책 기록을 놀라워했고, 방문한 손님들의 새해 계획표에는 ‘책을 더 많이 읽고 쓰자’는 것이 추가되었다.

손님과 나는 그렇게 해마다 1월에 전시를 하기로 결정하고 올해 벌써 세 번째로 책 전시를 진행하게 되었다. 2022년 읽은 책은 총 209권, 도서관에서 읽은 책을 제외하고 책방에서 전시하는 권수는 142권이다. 손님의 이름을 따서 ‘제 3회 동옥서재전’이다.

전시에는 손님이 읽고 기록한 책들과 노트를 테이블에 깔아두고 자연스럽게 볼 수 있게 했으며 2022년 한 해 동안 읽는 책들 중 손님이 꼽은 베스트책 세 권을 따로 전시하고, 판매도 한다.

작년에 읽은 책들 중 베스트 책으로는 ‘마이스트레인지 보이’(이명희 지음/에트르),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마이아 에켈뢰브 지음/교유서사),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지음/ 창비) 이렇게 세권이다.

이 중 ‘마이 스트레인지 보이’는 중증장애아를 키우는 엄마의 솔직하고도 담담한 기록이며,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라는 책은 스웨덴 여성 청소노동자의 진솔한 일기장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아버지를 둔 딸의 기록을 소설화한 것이다. 어쩌다보니 세 권의 책 모두 여성작가의 기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그 중 ‘마이 스트레인지 보이’와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는 힘이 들 때마다 더 깊이 써내려간 글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김동옥 님은 스웨덴 청소노동자의 책을 ‘지극히 작고 하찮은 개인의 하루를 적어나가면서 그 안에 나를 담고, 이웃을 담고, 사회를 담고 있는 일기’로 소개했다.

삶은 늘 고단하지만 숭고하리만큼 이웃과 사회에 관한 통찰력이 담긴 일기는 독자로 하여금 아무리 힘들어도 상냥함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선물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소개하는 글에는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오죽하면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지 않을까’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우리는 흔히 읽고 쓰려면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두 작가들의 글을 보면 쓰는 일에는 시간과 여유가 아니라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쓰다보면 더 쓰게 되고, 읽다보면 더 읽게 된다는 사실까지도. 동네책방에서 동네손님이 읽고 쓴 책을 펼쳐놓고 우리가 같이 보는 이유는 그 손님의 ‘읽고 씀’을 자랑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도 읽고 쓰는 사람으로 한 해를 살아보면 어떨까 작은 결심을 해보자는 데 이유가 있다.

특히, 지금 처한 상황이 앞으로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이야 말로 더 읽고 씀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읽다보면, 쓰다보면 삶이라는 것이 조금 더 나아지는 작은 기적들을 같이 느껴보자는 것이다. 글에서만큼은 눈치 보지 않고 솔직하게, 담담하게. 당신도 나도 올해는 작은 기적을 만들어보자. 준비물은 노트와 펜, 그리고 실천할 마음만 있으면 된다

이지선 잘 익은 언어들 대표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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