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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잎을 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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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잎을 세면서
  • 전민일보
  • 승인 2022.12.21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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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촐한 창밖에는 흰 눈이 풀풀 내리는데, 세상 줄을 놓지 못해 푹푹 안간힘을 쓰던 한 사람이 그만 맥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 시간 먼 골짜기의 눈부신 설경이 펼쳐지는 마을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다. 나의 창가에는 홀연히 날아온 듯한 햇살에 게발선인장 꽃이 눈부시도록 찬란하다.

겨울 햇살은 보기만 하여도 아까워서 햇빛 산책을 나섰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맨살을 드러낸 산들이 가슴 울컥하리만치 정겹고 안쓰러웠다. 거추장스러운 짐을 내려놓고 긴 휴식의 잠에 빠진 듯한 산이 안락하게 보였다. 바람은 차고 눈이 시리도록 하늘은 푸르렀다.

천만 명 넘는 국민을 학살한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외동딸 스베틀라나를 ‘작은 참새’라 부르며 사랑했단다.

히틀러의 후계자 격이던 헤르만 괴링은 막 걸음마를 시작한 딸의 안정을 위해 자동차도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아우토반(고속도로)을 폐쇄했다나?

히틀러는 자식이 없어 개에게 사랑을 쏟았다고 한다. 셰퍼드와 함께 밥을 먹고 침실에서 함께 잤다고 한다. 김정일의 딸 김여정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검은색 한복차림으로 조문객을 맞는 모습이 보였다. 김정일도 식사 때면 왼쪽 옆자리에 딸을 앉히고 ‘여정 공주’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단다.

독재자들은 백성의 생명과 안녕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 자기 딸이나 동물에게는 지극한 사랑을 쏟았다는 정신 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권력의 구도에서는 형제자매들조차 배제된다. 마음 놓고 부모의 죽음 앞에 당당하게 조문할 수도 없는 그들의 현실이다.

핏줄로 따지면 같은 부모를 공유한 자식들이요, 모두가 아버지 수령님의 아들딸인데 말이다. 봉건주의 시대 왕권 유지의 방법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신기하도록 안타깝다.

얼마나 긴 관습의 순환을 거쳐야 할까. 깨어나고 보면 한순간인 세상살이인 것을. 순수한 생명을 구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연일 바람이 차갑던 날씨가 좀 풀리는 것 같다. 그래도 겨울이다.

긴 휴식 중에도 빈 가지에 마른 잎을 달고 서있는 나무들에 기대어보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생명의 물줄기 한 호흡마다 기적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상을 경영하며, 자연에 기대어 땅과 호흡하는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는 것. 느티나무씨앗 하나가 바위틈에서 싹이 나고 크면서 바위를 갈라놓는 이 힘찬 생명의 숨결을 나눈다는 것이 경이롭다.

옛사람들은 동짓날부터 99소한도를 그리면서 겨울을 보냈다던가. 그 추웠던 시절 매화도를 그려놓고 매일 한 송이씩 붉은 물감으로 색칠하며 홍매를 피워냈다지.

마지막 99송이 홍매화가 피어나면 창밖의 매화나무에 진정 매화가 맺혀있다 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풍류를 누릴 수나 있었겠나. 특권을 누렸던 조선의 문인 화가들에게나 해당한 복이 아니었을까. 매화 그리기에 벽(癖)이 있던 조선후기의 화가 조희룡쯤이면 당연했으리라.

<매화도 대련>이나 <매화서옥도>는 겨울에 보면 어찌나 화사한지 이 추운 겨울이 무색할 지경이니 말이다.

그의 매화는 전 시대의 문인들처럼 매화를 짓누르고 있던 힘겨운 상징성과 지조 성을 전부 털어버렸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고고한 청덕(淸德)의 매화가 아닌 꽃 자체로 아름다울 뿐이다.

매화 병풍을 둘러치고 잠잔 뒤 매화차를 마시고 매화 시(詩)를 읊조린 그였으니 말이다. 화사한 매화도가 아니래도 추운 시대를 극복한 옛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동토의 북한도 우리도 그렇게 혹한의 시절을 잘 극복하면 좋겠다.

생명의 물줄기는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찬연한 빛을 자랑하던 게발선인장 꽃이 한 송이씩 시들고 떨어진다.

사막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아야 다시 찬란한 빛이 모일까. 99소한도를 그리듯이 떨어진 마른 꽃잎을 세면서 이 겨울 속의 봄빛을 누린다.

아마도 저 선인장 찬연한 빛이 사라질 때쯤이면 전주 경기전 뜰의 홍매가 피어날 것이다.

조윤수 수필가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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