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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인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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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인 의문
  • 전민일보
  • 승인 2022.10.0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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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러시아에 대한 제재(制裁)를 발표했을 때다. 예비역 장군 출신의 전문가 한 분이 그러한 제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함께 결국 부메랑이 될 뿐이라며 제재의 무용(無用)함에 대해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그가 전문가로서 보여주는 예리한 분석과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소박한 의문 한 가지를 떨칠 수 없어서 그에게 댓글을 통해 물었다.

“고견 잘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국제사회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하나요?” 유감스럽지만 그는 확실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애초 전망과는 다른 양상이다. 불과 며칠 만에 항복할 것이라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푸틴은 급기야 우크라이나를 향해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북한 김정은이 한국을 향해 핵을 선제 사용할 수 있다고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핵위협은 국제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한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의 대전제는 핵보유국이 비핵국을 향해 핵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핵위협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에 있다. 비핵국가를 향해 단 한발의 핵무기라도 사용되는 순간 NPT체제는 더 이상 존립근거가 없다. 모든 국가가 핵무장하는 지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했을 때는 물론 베트남과 아프카니스탄에서 패배를 감수할 때도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소련의 해체를 가져온 아프카니스탄전에서도 그랬다.

당시 무자헤딘은 사로잡은 소련군 얼굴 가죽을 벗겨서 돌려보냈다. 그처럼 굴욕적인 패배를 당해야 했던 소련도 패전을 감수할망정 핵무기를 사용하진 못했다. 핵무기는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 인류의 전범(戰犯)이 된다. 푸틴과 김정은은 그런 점에서 히틀러를 닮았다.

히틀러의 개인적 역량은 푸틴과 김정은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다. 히틀러는 서부전선에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또 하나의 거대한 적인 소련을 침공했다.

상식적이지 않다. 개전초기 스탈린의 대응도 의문이다. 스탈린은 독일의 침공 사실을 끝까지 믿으려하지 않았다. 거기엔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인식도 한몫했다.

히틀러는 스탈린을 무시했고 스탈린은 히틀러를 두려워했다.

1994년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공습을 계획했다. 이것이 실현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정부의 만류였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그때 한국정부의 결정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막았다는 평가가 주류다. 그렇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적대적 상대방의 끝없는 핵위협 속에서도 이처럼 평온함을 가질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몇 나라나 될까?

“동족인데 설마 우리를 향해 핵을 사용하겠어?” 라는 낭만적 상상력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책임 있는 당사자의 이미지여서는 곤란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초래한 암군(暗君) 선조(宣祖), 그에겐 전화(戰禍)에 대한 무한책임이 있다. 그런데 정말 임금 한 사람만의 문제인가?

당시 조선인들의 평화에 대한 환상과 염원은 지금 한국인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일본 침략에 대비해 성(城)을 쌓는 것에 대해 당시 조선인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1년 전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 영토로 확정하고 그곳에 우크라이나군 공격이 있으면 핵을 사용하겠다고 한다. 백령도를 북한이 점령한 후 그곳에 대해 같은 논리를 펼친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다. 만일 중국이 한국에 대해 러시아와 같은 행태를 보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쟁보다 평화가 아름답다. 불행한 것은 한국사의 비극 대부분은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너무 맹신해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상식적인 의문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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