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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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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알심
  • 전민일보
  • 승인 2021.12.29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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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새알심이 팥죽 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새알심은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빚어 수많은 행성, 혹성, 위성을 뜻한단다. 팥죽 한 그릇이 예사롭지 않다. 잔병을 없애고 건강해지며 액을 면할 수 있다하니 이보다 더 좋은 음식이 어디 있을까.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 동지는 밤이 가장 길고 낮이 제일 짧은 날이다. 옛 조상들은 동지를 작은 설이라 부르며 팥죽을 끓여먹었다.

정월 설날부터 시작하여 12월 섣달 그믐날까지 간간이 이어지는 세시풍속은 놀이며 먹거리가 의미 깊고 재미있다. 고된 일상생활 속에서 힘든 일을 잠시 접어두고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며 하늘에 감사드렸던 일은 조상의 슬기로운 생활이 아니었겠나. 시원한 물김치가 입맛을 더욱 북돋아준다.

6·25 사변 직후에도 동지는 돌아왔다. 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작은설이 돌아온 것이다. 엄마와 언니들은 온종일 팥죽을 만드느라 바빴다. 어린 우리도 새알심을 만든다고 둥근 상에 둘러앉아 손바닥을 굴려댔다.

언니가 가래떡 모양으로 길게 만들어 주면 동생과 나는 작은 도막을 내어 손바닥에서 굴려댔다. 어른들은 한꺼번에 서너 개의 새알심을 만들어 냈다. 우리도 서너 조각을 굴려댔지만 모두 떨어지고 겨우 한 개만 남았다. 다시 가느다랗게 기둥을 만들고 똑똑 떼어서 만들면 구슬만큼 작아졌다. 길쭉하게도 하고 눈사람 모양도 만들며 부셨다 만들었다 한참을 주물렀다. 하얗던 반죽은 까매지고 새알심은 터져버렸다.

“그것 너 다 먹어라.”

엄마가 핀잔을 주면 나는 재미있어 까르르 웃곤 했다. 동생과 나는 팥죽을 먹고 나이 한 살씩 더 먹는다고 즐거워했다.

엄마는 “귀신은 붉은 팥을 무서워한단다.” 하면서 집안 곳곳에 팥죽을 뿌리고 다니셨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학교 앞에 사는 아주머니가 머리에 함박눈을 잔뜩 이고 찾아왔다.

“어젯밤에 팥죽 도둑맞지 않으셨어요?”

“팥죽을 도둑맞다니요? 무슨 팥죽?”

“그 미친 여자가 팥죽 널벅지를 머리에 이고 ‘양 교장 댁 팥죽 돌라간다(훔쳐간다)’라면서 떠들고 가던데요?”

장독대에 황망히 나갔던 어머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들어오셨다.

“가져갔네요.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 어쩌겠어요? 먹고 싶어서 그랬나 봐요. 아휴, 다시 끓여야겠네.”

겨울바람 올올이 귀신 이야기가 스며 있어도 정신이 희미한 그녀는 무섭지 않았나 보다. 차갑고 팽팽한 추운 밤의 공기를 찢어대는 늑대의 울음소리도 그녀는 듣지 못했을까.

넓은 운동장 하얀 눈밭 위에 제 발자국이 꼭꼭 찍혀진대도 그녀에겐 상관없는 일이었을 게다. 오직 양 교장 댁의 그 팥죽 냄새만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 동물적인 감각으로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도록 했나 보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엄마가 먹고 싶어 가져간 음식을 어쩌겠는가. 항상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해죽해죽 웃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그 아줌마가 떠올라 엄마의 체념 어린 얼굴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나는 팥죽 한 그릇에 한 살씩 먹는다고 믿었던 여섯 살의 순진한 어린아이였다.

‘그 아줌마 어떡하지? 팥죽이 100그릇도 더 될 텐데. 할머니 되어버리겠네.’

폭삭 늙어버릴 아줌마가 걱정되어 울상 짓던 내 유년 시절이 떠올라 살며시 미소 짓는다.

팥죽 속에 동동 뜬 새알심이 이리 저리 밀려다닌다. 작은 우주가 빙글빙글 맴돌고 있다.

양영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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