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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공부방 그리고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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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공부방 그리고 서재
  • 전민일보
  • 승인 2021.08.0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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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원조는 육 남매가 부대끼며 공부했던 고향 집 골방이다.  어두침침한 골방에 틀어박혀 앉은뱅이 책상에서 연필심에 침을 묻혀 공책에 꾹꾹 눌러 글을 썼던 일들이 눈앞에 삼삼하다.

오늘날 나의 서재는 컴퓨터와 노트북까지 갖추고 호사를 누리고 있던 셈이다. 그런데도 전주 서재보다 아궁이에서 장작타는 연기가 매캐하게 나오고 벽에서 황토 냄새가 솔솔 풍기는 골방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본디 나의 아호는 곡송曲松이었다. 내인생의 좌표였던 고향 선배가 나날이 피폐해가는 고향을 안타깝게 여기며 굽은 소나무처럼 선산을 지키라는 의미로 점지해 주었다.

그런데 30년 전쯤 그 선배가 폐암으로 요절하기 전에 “늘 푸른 소나무가 되라”며 아호를 벽송碧松, 서재의 당호는 벽송당으로 작호綽號해 주었다. 그 선배의 운명은 내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선배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고향의 눈언저리인 전주에서 문학도와 산꾼으로 제2막 인생을 즐기고 있다.

2008년 선배의 여망에 따라 전주 신시가지에 4층 건물을 신축하면서 ‘벽송빌라’라는 머릿돌을 놓고 4층에 보금자리와 서재를 꾸몄다. 서재에는 수필가이자 서예가인 창암 조규열 회장이 일필휘지한 벽송당 편액을 걸었다.

요즘 서재에 걸린 벽송당 편액을 볼 때마다 그 선배와 고향 집 공부방이 뇌리를 스치며 만감이 교차한다. 모친은 십 년전부터 고향 근처의 요양원에 계시고, 5년 전에 부친이 운명하신 뒤부터 고향 집과 방이 적막강산으로 변해 버린 탓이다.

텅 빈 고향 집 공부방과 달리 전주의 서재는 넘쳐나는 책과 자료 때문에 항상 공간이 부족했다.

궁리 끝에 번잡한 신시가지의 4층 건물을 팔고 전원주택 분위기가 풍기는 상산고등학교 부근에 구입한 2층 주택으로 옮기면서 서재 두 개를 마련했다.

문학 서재는 문학 활동에 관련된 서적과 각종 동인지, 개인 문집 등이 빼곡하다.

산악 서재에는 등산과 향토지 등 각종 자료를 시·군별, 지역별, 분야별로 정리된 자료들이 한가득이다.

세 번째 서재는 전북산악연맹 상근부회장으로 봉직하며 제2막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 전북체육회관 사무실이다. 그곳에도 문학과 등산 관련 서적, 그리고 업무에 필요한 각종 자료 등이 책장을 꽉 들어찼다.

돌이켜보면 궁핍했던 학창 시절에는 나혼자만의 공부방을 갖는다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특히 양잠을 많이 했던 우리 집은 봄과 가을에 누에가 성장하면 잠실이 모자라서 별채의 잠실은 물론 본채의 방까지 꽉꽉 들어찼다. 누에에게 골방을 빼앗긴 육 남매는 마루나 잠실 통로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여기에 보리 수확과 모내기와 담배 농사까지 겹치는 춘잠春蠶때는 공부는 커녕 밥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부모님은 외양간 옆에 있는 잠실 도구 창고를 고쳐서 남동생과 함께 쓸 공부방과 큰 책상까지 마련해 주었다.

덕택에 골방과 앉은뱅이 책상을 차지하게 된 여동생들이 덩달아 환호성을 질렀다.

전주에 서재를 갖게 된 것은 제1막 인생의 보금자리였던 전주상공회의소 입사한 지 3년 후 남노송동에 단독주택을 구매하면서였다. 그 이전에는 육 남매의 무녀리로 동생들을 부양하느라 서재를 마련할 경황이 없었다.

행복의 곳간인 서재에 틀어박혀 가운데 손가락에 옹이가 박히도록 글을 썼다.

공휴일에는 향토지 발간을 위해 일제가 왜곡한 산경표의 우리 전통 지리를 바로잡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북 산사랑 회원과 서부지방산림청의 협조를 얻어 전북의 60개 산 정상과 5대강 발원지에 이정표도 설치했다. 전국에서 개인 산악회로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를 토대로 2001년에는 일제가 왜곡한 전통지리를 바로잡아서 발간한 ‘전북 백대 명산을 가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덕택에 산림청의 추천으로 국민포장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문학 관련 저서는 ‘어머니의 가슴앓이’, ‘지구를 누비는 남자’, ‘내 마음의 텃밭’, ‘자연의 속살 그 경이로움’, ‘천년의 숨결’ 등이 있다. 공동집필한 등산 관련 책과 향토지는 20권이 넘는다.

제2모작 인생의 보금자리인 전북산악연맹 상근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부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사업인 고창, 김제, 순창의 ‘디지털 전자 대전’에 ‘산’을 집필하였다. 아울러 시군 문화원과 행정기관의 협조로 ‘모악산의 역사문화’, ‘완주 명산’, ‘임실의 산과 강’, ‘장수의 산하’, ‘남원의 산하’ 등을 엮었다. 올해부터는 ‘전북의 산하’등의 집필 때문에 발바닥에 옹이가 박히도록 전북의 산줄기를 누비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선조들이 풍취 좋은 곳에 마련했던 누정과 서원들이 고향집과 공부방처럼 점점 쇠락해 가고 있어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있다.

게다가 고향 근처의 요양원에 계신 모친, 조상과 부친을 모신 선산, 부모님이 애지중지했던 전답들이 우리 부부의 낙향을 학수고대해서 죄를 지은 심정이다.

그런데 풍물패 단장과 상쇠를 맡은 아내는 늘그막에는 병원 가깝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며 낙향이란 말만 나오면 손사래를 친다.

나 자신도 공직생활과 문학 활동, 향토지 발간 등 산적한 현안 등으로 낙향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 대신 아내와 함께 수시로 고향 부근의 요양원에 계신 모친과 선산을 찾아뵙는다. 그리고 고향집 골방과 공부방을 찾아 옛 추억에 젖는다.

내 인생의 좌표였던 고향 선배의 여망과 수구초심首丘初心을 가슴에 되새기면서

김정길 영호남수필문학협회 전북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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