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3-29 23:09 (금)
콤플렉스 그리고 두려움의 이율배반
상태바
콤플렉스 그리고 두려움의 이율배반
  • 전민일보
  • 승인 2021.07.19 09: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1년 12월 26일에서 1992년 2월 4일까지 내가 유럽에서 만난 중국인은 스위스에서 유학중이던 교수 내외가 전부였다. 현지 화교는 제외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보고 중국인인지 물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대신 일본인이냐고 묻는 현지인은 곧잘 있었다.

파리에서 첫날, 우여곡절 끝에 찾은 작은 유스호스텔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던 젊은 남자가 나를 이렇게 맞이했다. “니혼진 데스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No, I’m Korean.”

내 말을 들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같이 있던 두 젊은 여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I don’t like Japanese.”

이탈리아 브린디시에서 베니스를 가는 기차를 탔을 때다. 내 맞은편에 일본인이 타고 있었다.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그는 친절했다. 그가 내게 던진 말 중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있다.

“한국인들은 통일을 원하나?”,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통일은 한국인 모두의 염원이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얼마 전 가 본 독일은 통일 후 수많은 사회적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국은 통일 후 발생할 수 있는 그런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해봤나?” 나는 그의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렇게 답했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통일이 한국인 모두의 바람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얘길 나누고 있는데 검표원이 다가왔다. 나와 일본 친구는 유레일패스를 그에게 제시했다. 일본인이 내민 승차권은 기간 내 일수가 한정된 플렉시 패스였고 내 것은 기간 내 무한정 사용 가능한 노멀 패스였다. 그런데 검표원의 태도가 이상했다. 상대적으로 변조위험이 큰 일본인 승차권은 바로 건네주면서 내 것은 한참을 유심히 살피더니 여권을 요구했다.

유쾌하진 않았지만 여권을 건넸다. 그런데 내 유레일패스와 여권을 번갈아 보던 검표원이 큰소리로 나를 부정 승차자라며 요금과 함께 벌금을 요구했다. 아니면 당장 기차에서 내리라고 말했다. 여행 중 당혹스러운 상황이 있던 그 순간엔 주변 어디에도 한국인은 없었다.

뭐가 문제인지 묻는 내게 그는 의기양양하게 유레일패스를 들이댔다. 거기에 적힌 여권번호가 잘못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혀 인식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나는 검표원에게 여행사 실수로 생긴 착오일 뿐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열차 책임자와 얘기하겠다는 나를 검표원이 마지못해 기차 안에 마련된 별도의 방으로 데려갔다. 기차 관리자는 차분하게 상황을 물었고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그러자 그는 수긍하며 이렇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베니스에 내리면 유레일패스에 기재된 여권번호를 수정하세요.”

현지승객들은 물론 일본인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셈이다. 일본인에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 불쾌함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베니스에서 일본인과 헤어진 나는 유레일패스를 구입한 한국여행사에 전화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집에 전화해 상황을 얘기하고 베니스 역에 있는 유레일패스 창구를 찾아가니 담당자가 나를 반겼다. 한국에서 연락을 받았다며 여권번호를 수정해줬다. 그 후 한 달 가까이 유레일패스를 더 이용했지만 검표원 누구도 더 이상 여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겪은 상황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1990년대 초반 유럽인들이 인식하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그대로 녹아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일본 관계는 변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를 변경한 것은 그 대표적 징표다. 아직도 죽창가를 부르는 세대의 의식엔 그것이 여전히 낯설게 보인다.

2030세대에겐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 그들에게 애국심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꼰대’라는 말도 붙이기 민망하다. 죽창가를 부르면서 중국몽 운운하는 중화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한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586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

일본과 중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으며 당당할 수 있는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2030세대의 등장이야말로 586의 역할이 끝났음을 웅변해주고 있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청년 김대중의 정신을 이어가는 한동훈
  • 신천지예수교 전주교회-전북혈액원, 생명나눔업무 협약식
  • 남경호 목사, 개신교 청년 위한 신앙 어록집 ‘영감톡’ 출간
  • 우진미술기행 '빅토르 바자렐리'·'미셸 들라크루아'
  • 옥천문화연구원, 순창군 금과면 일대 ‘지역미래유산답사’
  • 도, ‘JST 공유대학’ 운영 돌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