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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粉)내 같은 노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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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粉)내 같은 노랫소리
  • 전민일보
  • 승인 2021.07.07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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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그들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나에게 보여준 것은 ‘그’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한마리만의 노래요 울음이었다.

‘뻐꾹 뻐꾹’ 운다 하여 이름 붙여진 뻐꾸기다. 뻐꾸기 소리에는 유년의 화면이 있고 젊음의 영상이 있다. 오뉴월에 열기를 토해내던 아지랑이는 햇빛 멀미를 일으켰지만, 조용한 시골 길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의 소리는 젊음과 희망을 노래했고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행복을 안겨주었다.

곁엔 평생 동반자가 된 그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뻐꾸기만큼은 울지 않고 노래한다고 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우리 집 마당 위 전깃줄에 뻐꾸기 한 마리가 날아와 노래 부른다. 여러 마리 떼 지어 오는 일은 한 번도 없고 그저 혼자서 외롭게 앉아 노래한다. 하필이면 소나무도 아니요 목련의 가지도 아닌 삭막하기 짝이 없는 전깃줄에서 노래할까. 항상 혼자다.

숲이 진초록으로 변해가기 시작하는 7월이 되면 숲 속에서 노래한다. 숙주 새의 능력을 믿고 숲 속에서 여유를 부리는 모양이다.

많은 풀이 우거진 집 앞 공터는 새들의 놀이터다. 갑자기 뻐꾸기가 앞 공터 풀밭을 향해 내려가더니 사라졌다. 나는 살금살금 뻐꾸기가 내려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뻐꾸기는 보이지 않고 개망초 꽃 사이에 작은 둥지 하나가 보였다. 세상에나! 그 속에 나란히 앉아 있는 파란 알 세 개. 사오십 마리씩 무리지어 몰려다니던 뱁새들이 둥지를 틀고 보석 같은 알을 낳고 있었다니…. 파란 하늘이 두 손 모아 햇빛을 쏟아주는 듯했다.

저 뻐꾸기는 전깃줄 위에서 탁란할 둥지를 찾고 있었을까?

탁란하면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다. 1980년대 한무숙 씨의 「생인손」이라는 드라마다. 간난이라는 노파가 죽어가면서 신부님께 고해성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생인손을 앓고 있던 자신의 딸을 작은 아씨의 아기와 바꿔치기하여 양반으로 살도록 했으나 시대의 변천은 잔인했다.

자기가 기르던 양반의 딸은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교수가 되고, 우연히 마주친 가사도우미는 생인손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잃은 친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언년이의 목숨을 건 탁란에도 친딸은 끝내 종의 팔자를 면하지 못하고 말았다.

붉은머리오목눈이를 멍청하다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몰래 탁란시키려는 뻐꾸기와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속이고 속지 않으려는 심리전’은 약아빠진 인간들의 행태를 보는 듯 재미있다.

뻐꾸기는 숙주 새가 알을 두 개쯤 낳으면 그 사이에 자기 알을 낳아 교란 작전을 편다. 뻐꾸기의 만행을 알아챈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색깔이 다른 알을 낳기도 한다. 오목눈이보다 먼저 태어난 뻐꾸기 새끼는 눈도 뜨지 않은 상태에서 알을 모두 둥지 밖으로 떨어뜨려 죽게 한다.

답답하게도 붉은머리오목눈이는 그저 바라만보고 있다. 새끼를 키울 수 없는 뻐꾸기가 불쌍해서 도와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뻐꾸기가 가고 나면 알을 다시 낳자고 스스로 달래고 있는 것일까.

뻐꾸기의 행패를 눈치 챈 오목눈이가 둥지를 버리고 떠나면, 뻐꾸기는 둥지를 모두 부숴버리고 새로 만든 둥지까지 찾아가 다시 알 낳기를 기다린단다. 그래서 새들의 마피아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이제 뻐꾸기의 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라 표현해야겠다. 그는 항상 외롭게 혼자서 울음을 운다. 그것도 향기가 가득한 숲 속도 아닌 전깃줄에서. 외로워서 울고 새끼가 걱정되어 울고, 자식을 부양할 수 없는 무능력을 한탄하며 운다. 그러나 겉으로는 세상의 모든 만물에 자기는 고귀한 새처럼 우아함을 보여야 하는 긴장감에 떤다.

‘나는 절대로 남을 헤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비열함을 알지도 못한다.’는 듯 위선을 떨면서….

지금도 자기의 출세와 영리 목적을 위해 뻐꾸기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친절과 배려로 온화한 표정을 짓다가 밑바닥까지 훑어 가 버리는 사기꾼들. 돈 많은 노인에게 화려한 모습으로 다가와 친절과 서비스로 정신을 혼미하게 해 놓고서 재산을 몽땅 가지고 떠나버리는 꽃뱀들의 추행도 뻐꾸기와 다름이 없다.

“뻐꾹, 뻐꾹.” 오늘도 뻐꾸기는 전깃줄에 앉아 외로운 울음을 운다.

이제 또 무엇을 속이려고 얄밉도록 아름다운 소리를 분내처럼 풍기는가.

양영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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