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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잊혀진 영웅들 ④오기수] “한국전쟁 모두가 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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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잊혀진 영웅들 ④오기수] “한국전쟁 모두가 패자”
  • 정석현 기자
  • 승인 2021.06.23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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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즐비해 발 디딜 틈도 없어”
-최대 격전지 낙동강 저지선 팔공산 전투서 총상 등 3군데 부상
-“전후 세대 선배들의 숭고한 희생 잊지 말아야”

 

“모두가 패자인 전쟁이야. 6.25전쟁의 처참한 실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 돼”

6.25전쟁이 발발한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오기수(91) 선생의 우측 손과 좌측 둔부, 이마 등에 남겨진 상흔에서 당시의 처참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1월9일 입대해 6사단 7연대 소속이었던 그는 기나긴 민족비극의 시작을 목격한다.

1950년 6월25일 새벽 강원도 고탄. 난생 처음 보는 탱크와 6열로 늘어선 인민군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당시 철저히 전쟁을 준비한 북한과 달리 남한은 무방비상태나 다름이 없었고 전투력 역시 크게 기울어 있었다.

여기에 전방부대에 농번기 휴가를 장려했고 전쟁발발 하루 전인 6월24일 토요일 역시 외출과 외박을 허락했다.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인민군들은 무방비 상태의 남한을 순식간에 휩쓸었다. 말 그대로 불가항력이었다.

오기수 선생의 부대 역시 이내 후퇴를 거듭했다. 전우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수라장이었다.

춘천에서 홍천으로, 원주에서 충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중대장이나 소대장들도 대다수 지휘관들도 전사했다.

이후 소대를 지휘하게 된 그는 그해 9월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낙동강 저지선 팔공산 전투에 투입된다.

그는 이곳 전투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2개를 수여받았다.

당시 오기수 선생이 소속된 부대는 이제 막 불려 올라온 신병이거나 10대의 학도병이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젊은 생명들이 치러냈던 팔공산 전투는 그야 말로 처참했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시체가 즐비했지. 발 디딜 틈도 없었어”

“깜깜한 밤중에 무심코 걸터앉았는데 엉덩이 부분이 축축했지. 단순히 빗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시뻘건 피로 흥건했어.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

오기수 선생은 전쟁의 처참함과 함께 전쟁이 불러온 인간의 탐욕에 치를 떨었다.

“당시 전우가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공훈 쌓기에 눈이 먼 지휘관들도 있었어. 어린 학도병이나 신병들의 공적을 죄다 가로채기도 했지.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처럼 3년 넘게 이어온 6.25전쟁 내내 치열했던 격전지에서 오직 조국을 위해 싸워 온 오기수 선생.

전쟁이후 남은 것은 지금도 아려오는 3군데의 상흔뿐이지만 그는 여전히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보훈가족들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김제시지회 사무국장직을 맡고 있는 오기수 선생은 “6.25전쟁은 오직 패자만이 존재한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며 “그 무의미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참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쟁을 겪지 않은 후세들은 전쟁이 가져온 참혹함과 그 속에서 희생당한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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