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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한담(歸鄕閑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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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한담(歸鄕閑談)
  • 전민일보
  • 승인 2021.06.02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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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1년정도 지낸 적이 있다. 파리에 도착한 날 혼자서 저녁을 먹으려고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는데 필기체로 흘려쓴 메뉴를 읽을 수가 없었다. 대충 주문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토끼고기였다. 다음날 만난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조언하기를, 파리에 처음 온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많을 테니 노트에 적어두고 사진을 찍어두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특이한 것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예를들어 아파트 창과 베란다의 색깔과 디자인이 특이했다. 출근 길에 길가로 개방된 커피점에 들러 버터로 범벅된 크라상과 함께 파리사람들이 ‘꺄페’라 발음하는 에스프레소를 한잔씩 하는 광경도 인상적이었다.

대전에 10년쯤 살다가 전주로 와서 살게 되니, 새삼 눈에 띄는 것들, 느끼는 것들이 많다. 이전에도 전주에서 살았고, 지난 십년간도 부모님 사시던 집을 관리하느라고 주말마다 와서 지냈는데도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많으니 신기한 일이다.

전주의 길거리 간판에 보이는 이름들은 독창적이고 기발한 게 많다. 유머감각이 느껴지는 상호들도 많다.

전주는 교통의 흐름이 느리다. 대전도 서울에 비하면 느린데, 전주는 더 느리다. 사람들이 불편을 별로 못 느끼는 걸 보면 여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교통통제 시스템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해석이 더 맞을 것 같다.

전주는 겉모습이 많이 변하지 않은 도시다. 서부 신시가지 근방을 빼고는 지난 몇십년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전주의 음식 맛은 예나 지금이나 최고다. 지역 사람들이 맛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들을 다 뭉뚱그려보면 결국 전주는 느긋하게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최근 강연을 다니면서 두 가지 큰 글로벌 흐름으로 혁신과 세계화를 들어 얘기한다. 그런데 혁신과 세계화가 지나치게 빨리 진전되어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므로 속도조절을 하는 방향으로 여러나라의 정치가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전주에 오면 혁신과 세계화의 바람이 부는 걸 느끼기 힘들다. 속도조절을 할 필요가 없어 좋은건가.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전주는 살기 좋은 곳이긴 하나 능력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답답한 게 많다.

지역이 발전하려면 진취적인 기상을 높이 평가해주고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추진력 있는 사람들을 앞장 세우고, 여러 분야에서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일하는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제조업이 중심산업이었던 시대에는 지역의 산업발전과 삶의 질 사이에 긴장된 관계가 있었다.

산업발전에 따른 소득향상이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지만 환경문제 등을 야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산업이 중심이 되는 시대에는 살기 좋은 지역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러면 지역은 더 발전한다.

전주에 대해 주로 얘기했으나 전라북도 전체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산업 시대에는 혁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키우고 끌어당겨야 한다. 사람을 키우는 데는 지역에 있는 대학들의 역할이 중요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데는 지역 정부와 지역 정치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근 있었던 일로, 지역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중앙부처사업이 있어서 도전해보는 게 좋겠다는 제언을 했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이 힘들 거라고 지레 결론 짓고, 제대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말 저런 말 하다 보니, 느긋하게 지내려고 고향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사람이 말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주는 현재 그대로도 살기 좋은 곳이다.

채수찬 경제학자,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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