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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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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노릇
  • 전민일보
  • 승인 2021.05.26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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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노릇, 할아버지 노릇도 끝내고 산을 찾을 나이가 되었지만 요즘 아버지들의 처지를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아버지 노릇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젊은 아버지들은 아버지 노릇을 잘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눈높이가 높아지고 장모님 눈치까지 보느라 마음고생이 큰 모양이다.

아버지들의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가정에서 아버지들의 순위가 애완견보다 못하다고 하던 어떤 아버지의 푸념이 생각난다.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여 냉장고에 들어있는 간식을 먹고 아침에 아내와 아이들로부터 혼났다고 한다. 애완견 주려고 사다 놓은 애완견의 간식을 먹어버린 것이다.

아버지들의 권위가 무너진 것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부터다. 직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대량해고와 조기퇴직의 세찬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고 휴일도 없이 일하다 보니 가정에서 하숙생으로 전락했다.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아버지들의 위치는 더욱 위태롭게 되었다. 옛날에는 나이를 먹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지식들이 많았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 하여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존중했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모든 지식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담겨 있으니 나이 든 사람들의 지식이나 상식이 별로 쓸모가 없어졌다.

금융시스템이 전산화되기 전에는 봉급날 만이라도 다소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얄팍한 봉급봉투지만 양복 윗주머니에 넣고 집에 가면서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라도 사가지고 집에 들어가면 가장으로 다소의 체면은 세울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봉급은 아내가 가지고 있는 통장으로 고스란히 입금되고, 명세표만 들고 들어가니 봉급날의 의미마저 없어져 버렸다.

옛날 어머니들은 맛있는 음식을 하거나 이웃에서 별미가 들어와도 아버지가 안 계시면 먼저 먹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뒤에야 함께 먹었다. 평소 식사를 할 때도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드신 뒤에야 음식을 먹었다.

우리 또래들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아버지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엄격하고 호랑이처럼 무서웠다. 고집이 세고 가족들 말은 잘 듣지 않고 매사를 혼자 결정하셨다고 하는 친구들이 많다.

옛날 아버지들은 가족을 사랑하는 표현 방법이 지금과는 달랐다. 목화솜 이불처럼 무겁고 은근했다. 가족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도 겉으론 무관심한 척하고 때론 일부러 엄격하게 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많다. 아버지는 공부도 가르쳐 주셨지만 윷놀이, 고누, 장기, 바둑, 화투도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는 일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잘해야 하지만 노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셨다. 직장 생활할 때 휴가나 휴일에 고향에 가면 아버지와 밤을 새우며 바둑을 두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잘못을 저질러도 즉석에서 꾸지람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타일러 주셨다. 어떤 때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언제쯤 아버지가 부르려나 기다리다 스스로 아버지에게 잘못을 빌기도 했다.

요즘 아버지들은 아버지 노릇하기 힘들다는 푸념만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언젠가 읽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생각난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자식들 교육을 위해 노심초사한 옛 아버지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수신제가에 성공한 아버지였다.

옛날 아버지들이 가족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기까지는 힘들고 어려울 때 가족들 몰래 한숨쉬고 눈물 훔치며 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재에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며 아버지 바둑 한수 하실까요? 하면 금방이라도 껄껄껄 웃으시며 좋아하실 것 같다.

최기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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