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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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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소리
  • 전민일보
  • 승인 2021.04.14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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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 봄을 실어 나르는 보슬비가 온 누리를 촉촉이 적시고 있다. 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이 포근하게 내리는 봄비를 만나 작별 인사를 나눈다.

거센 눈보라를 뒤집어쓰고도 푸른 옷을 벗지 않던 소나무들도 이제는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면서 달려오는 봄을 향해 미소 짓는다.

쏴아~~! 빗소리와 함께, 고요한 침묵을 깨고 무거운 흙과 돌을 밀쳐내면서 연약한 새싹들이 힘차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봄은 우주를 밀어내고 있다. 그 많은 돌과, 거대한 흙더미를 뚫고 올라오다니…….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 것일까?

이제 동토의 땅에 온기가 서린다. 봄비 내리자 춘빙春水은 겨울의 훈장을 하나둘 떼어 낸다. 아직 먼산 응달진 곳에는 희뿌연 잔설이 남아 있지만 시냇가의 버들강아지는 뾰족이 솜털을 내민다.

난 지금 긴 겨울의 침묵을 깨우는 봄의 소리를 듣고 있다. 언 몸을 뚫고 나오는 끈질긴 생명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고 있다.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순간이다.

봄은 우수水의 절기와 함께 온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에도 봄 소리가 묻어 있다. 온갖 나무들은 가늘게 실눈을 뜨고 있다. 정녕 봄은 다시 오는가 보다. 봄은 또 꽃과 함께 온다. 봄을 알리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보다 꽃이다.

겨울 내내 숨죽이고 있던 봉오리는 3월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씩 피워서 화려한 꽃봉오리를 만들어 내고 이내 전국을 꽃으로 물들게 된다.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인가.

곧 매화, 목련, 개나리, 진달래, 복사꽃이 활짝 피겠지. 이중 매화는 비련의 여주인공만큼이나 가냘프고 애처로운 모습이며, 진달래꽃은 연분홍 물들여 곱게 바느질한 옷을 차려 입은 가녀린 여인 같다.

유소년 시절 고향 뒷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그 꽃을 한아름 꺾어 가슴에 안고 내려오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가슴 설레는 봄, 봄 빛깔, 봄 향기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벌써 내 마음이 붉어지려고 한다.

봄은 왜 오는가? 꿈을 꺾고 시들어 죽어가던 영혼에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서다. 자연은, 봄에 나서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익고 겨울에는 저장하고 쉬는 것이 이치이다.

사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극칙반의 원리다. 겨울이 극에 이른즉 봄이 오는 것이고, 봄이 최고로 발전하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극에 달하면 가을이 되며, 가을에 할일이 모두 끝나면 만물이 쉬는 겨울이 되는 것이다. 봄과 여름은 물질이 작용하는 계절이고, 가을과 겨울은 신이 작용하는 계절이다. 삶과 죽음의 질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TV화면에서 여수 오동도의 동백꽃이 새색시 볼처럼 붉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았다.

동백冬柏은 겨울에 피는 꽃이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푸른 잎사귀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 붉은 동백꽃, 세찬 바닷바람을 견디며 봄을 찾아 나온 동백꽃의 자태가 선비처럼 고고하다.

나는 여러 봄꽃 중에서 늦봄에 피는 찔레꽃을 가장 좋아한다. 개울가 언덕이나 야트막한 산언저리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다발로 핀 찔레꽃, 고려시대 몽골로 끌려간 찔레소녀의 전설이 서린 들장미꽃, 가족을 찾아 고향에 돌아왔지만 끝내 못 찾고 죽어 피어난 꽃, 헤매던 골짜기마다 덩굴째 우우우 핀, 수줍고 순박한 꽃. 그 향기가 너무 슬퍼, 밤새워 울었다는 소리꾼 가객' 장사익의 찔레꽃 노래가 가슴을 후려친다. 비감 어린 그의 노랫소리가 한스럽게 들린다.

푸르른 녹음 속 비탈진 산언덕에 하얗게 핀 찔레꽃, 가시덤불 사이로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화장기 없는 사춘기 소녀의 티 없는 얼굴 같다. 내가 유독 찔레꽃에 정이 끌리는 것은 찔레꽃에 서린 아련한 추억 때문이다.

찔레순 꺾어 껍질 벗기면 파란 속살의 진액, 그 속살을 입속에 넣고 씹으면 상큼한 찔레 향과 함께 달착지근한 물이 입안에 돈다.

허기 달래려고 찔레 순 꺾어 먹던 어린시절, 방과 후 산으로 들로 찔레순 따 먹던 그 시절에 찔레순은 나의 유일한 여자 친구였다. 장미보다 강렬하지 않고 백합보다 희지 않아도 나는 찔레꽃을 사랑하다 속절없이 늙어버렸다.

찔레꽃은 시집가 남편 잃고 평생 수절한 과부다. 아련한 달빛이 찔레꽃을 감싸안고 흐드러지면 선녀의 치마폭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정을 느낀다.

5월이 오면 온누리에 짙은 향기 풍기는 찔레꽃, 내 고향 들길에 하얗게 핀 찔레꽃이 마냥 그립다.

봄은 우리에게 철학의 많은 소재를 준다. 자기 집 뜰의 조그마한 화단에 꽃씨를 심으면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사색에 잠긴다. 모락모락 자라나는 어린 아기의 맑은 눈동자와 깨끗한 웃음을 바라보면서 생의 신비감에 경이를 느낀다. 그래서 봄은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봄은 거저 오는 게 아니다. 겨울이 지나지 않고는 봄이 올 수 없다. 모진 북풍한설을 겪고 이겨내야 봄이 온다. 기나긴 인고忍苦의 기다림이 있어야 봄이 온다. 봄의 고마움은 인생의 겨울을 거친 자에게는 더욱 새로울 것이다.

신영규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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