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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가 된 존재, 김기덕 형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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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가 된 존재, 김기덕 형을 추모하며
  • 전민일보
  • 승인 2020.12.22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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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도와 줬다고 믿는 사람이 말했다. “내가 이제 거물이 되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취했구나.’ 굳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의 경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초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변해버린 그들을 보면서 되돌아 본 것은 내 모습이다. 나는 과연 어떻게 변해왔고 지금 어떤 모습인가.

내가 처음 그에 대한 글을 쓸 때는 기뻤고 두번째는 어려움에 처한 그를 옹호하고자 했으며 세 번째는 괴물이 된 그에 대한 실망과 비판을 전했다. 이제 그에 대해 마지막으로 할 말이 남았다.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감염으로 쓸쓸하게 숨져간 김기덕 형에 관한 것이다.

그의 죽음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고민과 두려움이 자리한다. 조문이 금기가 된 것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하는 존재는 단테(Alighieri Dante)의 세상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는 불행한 영혼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추모하는 것은 내가 본 그는 괴물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맑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추모하는 대상은 세계적 명성을 가진 영화감독 김기덕이 아니다. 1992년 1월의 그는 분명 가진 것 없고 무모한 돈키호테였지만 그렇기에 참으로 매력적인 존재였다.

경북 봉화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가 해병대 하사로 제대한 후 여권 하나만 들고 프랑스에 온 것 자체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반드시 그림으로 성공하겠다.”

그가 보여준 수십 장의 사진(자신의 그림을 촬영한)을 보면서 난 이런 물음을 던졌다.

“몽마르트에서도 그리시나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를 조롱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몽마르트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피아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곳이 아비뇽이라는 것과 그곳에서 알게 된 알제리 출신 친구 덕분에 거리의 화가로 살아갈 수 있노라고. 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무협지 속에서나 가능한 삶을 사는 사람이구나.”

김기덕과 같이 북유럽을 여행했던 3일간 기억나는 또 한명의 인물은 서울 어느 대학에 재학중이던 미술대생이다. 나는 김기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에게 물었다.

“나는 미술에 문외한이어서 판단을 못하겠는데 당신이 보기에 이 분이 그림으로 성공할 것 같습니까?” 그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뻔히 보이지 않나요.”

그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후일 성공해서가 아니라 그의 성공을 반추할 수 있도록 만든 존재감 때문이다.

기차 좌석에 앉아있는 내게 다가와 살뜰하게 먼저 말을 걸어준 것도 김기덕이었고 자신의 삶을 그림처럼 묘사한 것도 1992년 1월의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 핀란드 헬싱키를 가기위해 탔던 유람선(실자라인) 내부를 같이 동행하며 카지노 게임의 룰을 설명해주던 그의 모습은 따뜻한 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그와 3일간의 동행을 마치고 헤어진 곳은 코펜하겐이었다. 그는 나와 다른 두명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스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인만큼 헤어지기 전에 점심을 사겠습니다.”

나와 일행은 사양했지만 그는 정중하게 자신의 뜻을 거듭 말했다. 동행했던 두 사람은 전혀 기억이 없지만 김기덕 형과 스테이크를 가져오던 덴마크인의 모습은 지금까지 또렷하다.

그것은 주머니가 가벼운 내가 43일간의 유럽여행 중 가진 가장 의미 있는 만찬이었다.

“김기덕 형! 머나 먼 이국에서 쓸쓸히 숨져간 형을 보면서 헬싱키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다시 보게 됩니다. 형이 괴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도 기억의 부조화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형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조차 금기가 된 지금, 감히 형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1992년 1월의 형은 누구보다 맑은 영혼이었으니까요. 형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1992년 1월 헬싱키에서 김기덕과 함께
1992년 1월 헬싱키에서 김기덕과 함께
김기덕 친필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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