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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청년정책 과감히 펼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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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청년정책 과감히 펼칠 것"
  • 홍민희 기자
  • 승인 2020.11.23 0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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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전북을 떠나는 청년들의 숫자가 1만2000명을 헤아린다. 이들이 장강명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 아니 '전북이 싫어서' 짐을 꾸리는 것일까.
결코 그렇진 않을 것이다.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청년들이라고 모를리 없다.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받기 위해, 그 교육서비스를 활용한 양질의 일을 하고 싶을 뿐인데 전북은 그러한 인프라도, 당장의 놀거리도 마땅치 않다. 지역에서 미래의 희망을 외치는 일은 그래서 공허했다. 청년을 외치는 행사들은 유행처럼 번져갔지만 관 중심의 행사에 청년들은 '들러리'일 뿐이었다. 이런 현실에 반기를 들고 돈키호테처럼 등장해 전북 청년들의 '스피커'가 되어 준 사람이 있다. 호기심 많은 사업가에서 사회혁신을 고민하는 기관장이 된 원민 전주사회혁신센터 소장이 그 주인공이다. /편집자주

엉뚱했다. 처음부터 엉뚱한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남들보다는 튀었다.

대학 입학 당시 부모님의 인적사항을 적는 란에 아버지 이름은 넣지 않고 '이젠 아버지 그늘 밑에서 독립할것이기 때문에 넣지 않았다'며 당돌하게 말하던 20살 원민(33) 소장은 전주에서 나고 자란 '전주 토박이'다. 하지만 자신도 전주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큰 인물들은 다들 금의환향을 꿈꾸며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대학 때 추억도, 친구도 별로 없습니다. 그저 독서실에 틀어박혀 자격증 준비와 어학준비 등을 하며 공부만 했거든요."

지방대학교, 그것도 지방 사립대를 나와서 자신이 성공할 길은 공부 뿐이라고 여긴 원 소장은 낮에는 학업을, 밤에는 알바를 전전하며 살았다. 성인이 된 이후 경제적 지원을 최소화 한 부모님의 선택 때문이었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던 원 소장은 교환 학생 신분으로 중국에 발을 디뎠다. 학교보다는 길거리에서 배운 생활언어를 스펀지처럼 빠르게 습득해 3개월 만에 중국인들과 농담을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고도 불안했던 '지방대생' 원 소장은 이력서 한 칸을 더 채우기 위해 통역봉사에만 2천시간을 투자했다.

통역 일을 하며 만난 수도권 대학 재학생들은 자괴감이 들 정도로 멋진 학벌에 걸맞는 스펙을 온 몸에 휘두르고 통역일을 할 때도 보다 좋은 곳으로 의전을 갔다. 봉사활동에도 '학교 급'이 있다는 사실은 어린 원 소장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래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직장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 소장이 생각한 직장생활과 현실에서 마주친 직장생활은 너무 큰 차이가 났다. 하고 싶은게 많았던 원 소장의 열정은 회사에선 그저 '귀찮은 일'을 만드는 성가신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했다.

부모님의 눈물섞인 호소를 뒤로 하고 3개월 만에 그만뒀다. 자발적 백수가 된 원 소장은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봤다. 나고자란 전주를 떠나는 친구들, 동생들을 보면서 지역에서 꿋꿋히 버티고 있는 대학생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SNS에 '우리가 깨달은 것들(우깨)'를 열었다. 2014년 겨울이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지역 청년들이 말을 할 공간이 없어서 그간 말을 안해온 것 아닐까 싶을정도로 많은 담론과 수다, 고민들이 이어졌어요."

휴대폰 안에서만 웅성댔던 '우깨'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돈이 없어서 번역 알바 일을 하며 번 돈으로 공간을 만들어갔다.

지역에서 처음 시도되는 행사들을 기획해 냈다. 크리스마스 시즌엔 옆구리가 시린 솔로들만 모아서 누가 더 서글픈지 대결도 했고, 한옥마을에서 과거시험을 열고 시험 과목으로는 토익책 멀리 던지기 등 기성세대는 생각지도 못할 기상천외한 일들을 꾸며냈다. 그리고 늘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독특하면서도 청년들을 모으는 힘이 있는 원 소장은 각종 청년 정책을 얘기할 때 초대해야 하는 '귀한 손님'이 됐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의 세계에 초대된 구색맞추기용 참가자가 된 적도 많았고, 관 행사에 청년들을 동원해달라는 전화를 받을 때면 힘이 빠지곤 했습니다."

단순히 지역 청년들 몇명이서 깔깔 거리는 일을 넘어 이들이 지역 현안에 함께 참여하고 지역을 바꿀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우깨를 운영하며 기획력 등을 인정받은 원 소장은 보폭을 확장했다. 적극적으로 사업기획안을 만들어 정부부처에 제안했다. 전주시와 전북도와도 활발히 소통했다.

그러다 전주시가 행안부 사업의 해당 지자체로 선정됐는데, 우깨 대표였던 원 소장은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와 컨소시엄을 통해 민간위탁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사회혁신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주민들이 직접 해결해나가는 일련의 모든 행위로 그 중에서도 원 소장이 주력한 것은 지역 청년들이 자기 스스로 청년 의제를 다루며 그 안에서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직원들도 지역 청년들 위주로 채용했으며, 청년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위주로 구상했다.

지난 4월 탄생한 '재난위기 청년백서'는 전국 최초로 시도된 코로나19 시국의 지역 청년들의 아카이빙으로 원 소장과 직원들이 합심해 백서 제작에 참여하는 청년들에겐 지원금을, 백서 편집을 도맡을 지역의 프리렌서들에게도 활동비를 지급해 지역 경제 활성화까지 도모했다. 200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했는데 단 1분만에 모집이 마감될 정도로 지역청년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지금 지역의 청년들은 큰 돈이 필요한게 아니라 당장의 교통비, 당장의 점심값 해결이 급한 경우가 많아요. 그들에게 시혜적으로 돈을 베풀기 보다는 정당한 일거리를 제공하며서 그에 대한 댓가로 활동비를 지급하는 것이 지역 청년들이 진짜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샛방살이를 끝내고 사업을 시작한지 2년만에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새 공간으로 터전을 옮긴 '사회혁신전주'. 원 소장은 쾌적한 공간에서 더욱 많은 청년 의제를 논하고 청년들이 참여해 그들 손으로 만들어가는 청년 정책들을 과감히 펼친다는 각오다.

 

"사회혁신전주가 다양한 시도가 보장되고,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모든 과정과 결과들이 경험 자산으로 축적되는 곳이었으면 해요. 그러기 위해 저부터 노력할거구요."

이제는 토끼같은 두 아이의 아빠이지만 여전히 청년의 푸르름을 안경 너머 눈속에 담고 있는 원 소장의 다음 행보는 또 어떤 의미를 남길지 자뭇 궁금해졌다.
홍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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