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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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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뒤’
  • 전민일보
  • 승인 2020.11.1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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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희한한 단어다.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그곳만의 독특한 어휘다. 토박이 우리말은 아닌 성싶다.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끌어낸 간디의 사촌쯤 되는 사람의 이름일까? 아니면 간첩노릇을 하다 붙잡혔던 어느 대학 교수의 가짜 이름인 깐수의 형제이름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아무리 사전을 뒤져도 그런 말은 찾을 수가 없다. 영어나 중국어사전은 보나마나 나오지 않을 게 뻔하다. 한글로 씌어진 글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조계산 선암사(仙巖寺)를 찾을 때마다 '깐뒤'란 팻말을 보며 슬며시 웃음을 짓는다. 일부러 동행자들을 그곳으로 유인하여 그 글자를 읽어보라고 권하면, 대개 십중팔구는 '깐뒤'라고 읽으며 의아해 한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판자에 먹으로 '깐뒤'라 쓰여져 있다. 유명한 서예가의 글씨는 아니다. 낙관이 없는 것으로 봐서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대궐이나 각 지역의 문루(門樓) 또는 정자에는 고급스런 현판이 걸려 있다. 그 현판은 대개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로 만들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 고급 현판에 익숙한 눈으로 "깐뒤"라 새겨진 글씨를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어느 장난끼 넘친 스님이 일부러 그렇게 써 붙인 게 아닐까? 문화재급 문루의 현판이 양반 티 나는 우아한 이 도령의 모습이라면 '깐뒤'란 팻말은 상놈티 나는 방자의 차림새나 다름없다.

나는 이따금 술자리에서 '깐뒤'가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물어보곤 한다. 그러나 정답을 맞춘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다행이 그 술자리엔 선암사에 다녀온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유식한 체 '깐뒤'란 말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면 모두가 배꼽을 잡으며 웃는다.

선암사는 한국적인 절의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한 천년 고찰이다.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조계산에 대가람을 일으켜 선암사라고 했다고 하니 얼마나 유서 깊은 사찰인가? 그런 사찰에 '깐뒤'란 팻말이 붙어 있으니 도선 국사가 부활하여 그 팻말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찰의 화장실은 대부분 해우소(解憂所)라고 부른다. 온갖 근심과 걱정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는 곳이니 얼마나 좋은 곳인가? 그 이름에서 구린내를 연상하는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오히려 도통(道通)할 수 있는 선방(禪房)쯤으로 여기는 게 당연하려니 싶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 절 선암사는 왜 해우소라 하지 않고 '깐뒤'라 했을까?

아마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은 어떤 스님이 한 글인데 습관적으로 한자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게 아닌지 모를 일이다. '뒤깐'이라고 써야 할 것을 '깐뒤'라고 썼다는 이야기다. 사실 '뒤깐'은 우리네 표준말이 아니다. 제대로 쓰려면 '뒷간'이라고 쓰는 게 옳다. 그런데 '뒷간'이라고 하면 우선 옛날의 측간이 연상되고, 측간이라고 하면 구린내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또한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인 곳으로 여겨진 곳이 뒷간이다. 오죽했으면 우리 선인들이 측간과 처가는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고 했을까?

선암사 '뒷간'은 전통적인 한옥건물이다. 아파트나 양옥에서 양변기만 사용하던 사람들이라면 감히 볼일을 볼 엄두도 내기 어려울 것이다. 너무 깊고 넓어서 허리띠를 풀 용기조차 낼 수 없을 줄 안다. 군대에 가서 유격훈련을 받은 사람의 용기가 아니라면 엄두가 나지 않을 게다.

그곳에 써 붙인 글자는 '깐뒤'가 아니라 'ㅅ간뒤'란 고어체(古語體)로 쓰여져 있다. 그러고 보면 그 표기의 연대는 한글을 훈민정음이라고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모른다. 언제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두고두고 사찰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하는 묘미가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깐뒤'란 말도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남자라면 바지와 팬티를 내린 뒤에, 또 여자라면 치마는 올리고 팬티는 내린 뒤에 용변을 보아야 하니 말이다. 어쨌든 너무 해학적이며 깊은 상념에 젖게 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유서 깊은 선암사를 찾을 때마다, 나는 법당이나 석탑, 부도(浮屠)보다는 '깐뒤'에 더 멋과 매력을 느낀다. 그 '깐뒤'란 푯말이 먼 훗날 세계 유일의 국보급 문화재가 될지 누가 아는가?

김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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