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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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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계절에
  • 전민일보
  • 승인 2020.10.28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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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햇빛이 엷은 홍시로 익어간다. 햇빛이 무르익을수록 가을향기도 덩달아 익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고동색 가을 향기. 날씨가 너무 예뻐서 잠을 자는 것조차 아까운 계절인 가을.

지난여름 태양은 장맛비 구름에 가려 제구실을 못했었다. 여름내 눅눅했던 하늘은 햇볕이 무던히 그리웠을 것이다. 그런 일조량 부족 때문인지 올 가을 햇볕은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랐다.

가을이 왔다. 밤송이에도 빨갛게 익어가는 홍시에도 가을이 왔다. 산을 에둘러 흐르는 은빛 강줄기 위에도 갈색 바람이 머무는 숲에도, 여인의 옷자락에도 가을이 소리없이 내려앉았다.

가을이 흐르고 있다. 내 가슴속에도 가을이 뜨겁게 흐르고 있다. 거리를 오가는 발자국마다 가을이 군데군데 고여 있다.

바람이 분다. 청량한 가을바람이 분다. 코 속으로 흡입된 공기가 맛있다.

가로수 느티나무 여린 가지가 갈색바람을 타고 몸을 비틀어 춤을 춘다. 제물에 떨어져 말라 비틀어진 마른 잎은 대지를 애무하며 구른다.

호수에 빠진 가을을 본다. 물위에 가을 향기가 떠 있다. 굽어진 산허리 밑에 호수를 이루고 있는 임실 옥정호, 옥정호엔 지나온 삶의 애환과 궤적이 절절이 흐르고 있다.

가을은 포만의 계절이다. 그저 먹지 않고 바라만 봐도 마음까지 풍요로워지는 황금빛 들녘이 있어 좋고 오곡백과가 알알이 영글어 가는 그 향기가 좋다.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봄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명한 가을 분위기는 정을 느끼게 하며 친근감을 더해준다.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사랑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인간의 연약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의 무한함에 감사하게 된다.

맑은 하늘을 보고 진실을 생각하면서 여유를 느끼게 되는 것도 가을이다. 가을이 되어 생각이 깊어지면 우리는 그 생각의 틈새에서 사랑이 싹트는 느낌을 갖게 된다.

가을이 부르는 소리 있어 문을 열면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 빛나 그리움을 탄다. 그리움은 외로움을 부르고 외로움은 또 그리움을 부른다. 그리움이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립고 떠나간 옛 임이 그리워진다. 혼자 있는 사람은 외로움에 지쳐 때론 손발이 마비가 되고 가슴까지 까맣게 타들어 간다.

그런데 외로움이 꼭 가을에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텐데 가을만 되면 유독 외로움이란 말을 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여름날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뭇잎이 알록달록 물이 들어 잎을 떨어뜨려야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잎을 다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는 매서운 북풍한설을 혹독하게 견뎌야 하는 아픔이 있다. 그래야 이듬해 봄에 새 잎을 틔울 수가 있다.

가을은 사유의 계절, 외로움의 계절이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다시 또 생각에 잠겨 존재마저 망각된다. 때론 초점없는 시선이 허공에 묶여 있다. 그럴때면 지구에서 수백억 광년 떨어진 이름 모를 태양계를 생각하며 사념하고 또 사념하다 새벽녘까지 잠 못이룰 때가 있다.

가을이면 난 강가에 외롭게 서 있는 갈대가 된다. 바람이 불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른 잎새를 서걱이며 슬피 우는 갈대. 파스칼은 그의 유고집 ‘팡세’에서 한줄기 갈대를 통해 사유를 설명했다.

가을은 인생의 계절이다. 나이로 따지면 원숙한 시기를 살고 있는 오육십 대의 계절에 속한다. 고로 가을은 삶의 계절이며 영혼의 계절이다.

자연은 모든 걸 불평하지 않는다. 자연은 진실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말없이 인내한다.

자연은 기만하지 않는다. 자연은 목적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맑은 하늘을 보고 진실을 생각하면서 더 투명해지고 싶어지는 때도 가을이다. 가을이 되어 생각이 깊어지면 우리는 그 생각의 틈새에서 사랑이 자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가을은 우리를 외롭게 한다. 웬지 쓸쓸하고 허무하고 수많은 그리움이 고개를 든다. 이렇게 우리의 모습을 추슬러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 곧 가을이 소리 내어 흐느껴 올 것이다.

농익은 늦가을이 목 놓아 피울음을 토해낼 것이다. 가을이 울면 나도 운다. 가을은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인생의 계절이다.

신영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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