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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고광계 의사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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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고광계 의사의 생애
  • 전민일보
  • 승인 2020.07.2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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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일념으로 국외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 대표적인 곳이 만주(중국 동북지방)였으며, 서간도와 북간도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전북 부안군 상서면 노적마을 고광계(高光契·일명 고광설) 의사는 1920년 10월 대한광복단 함경남도 갑산분단(甲山分團) 교통원으로 활동한 사항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조선총독부) 고등경찰에서 일본 총리대신과 각 대신 등에게 제출한 보고문서가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 자료는 원문서(국사편찬위원회 소장사본)와 일본에서 발간한 <조선독립운동>이란 책(1967년) ‘민족주의 운동편’, 일본 동경(東京) 원서방(原書房)에 실린 두 가지 중요한 자료이다.

대한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고광계 의사는 이 단체의 핵심 일원으로 참여했고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두 번째 독립운동 활동 별도 자료를 확인한 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매일신보>에 기사가 게재되었으며, 1921년 1월 8일, 또는 1월 18일자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세 번째 자료로 ‘전북연구원’에서 간행한 <전북학연구>1호(2019년 12월 31일)에 게재 됐다. 장세윤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고광계 의사는 대한광복단(1897~1933)연락원의 직책을 맡아, 1920년 전후 시기에 중국 길림성 장백현(長白縣)과 함경남도 혜산진, 고향인 전라남북도 일원과 국내 지역을 왕래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사정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고씨 대관(2003년 7월 1일) <독립운동공훈인명록>에는 고광계 의사는 함경남도 혜산진에서 주로 활동하는 대한광복단 갑산분단의 국외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고 명부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발굴한 6개 문헌에 여섯 번 성함이 수록됨은 물론, 대한광복단에서 활동한 연혁이 게재되어 있었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광계 의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아들 3형제와 함께 의병 7천여 명을 거느리고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혈투 끝에 순절한 고경명 장군의 13세손이다. 선조(先祖)의 의로운 행위를 본받아서인지 젊은 학자의 기백으로 의연히 일어서서 국권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했다. 대한광복단에서 헌신적인 활동을 하신 고광계 의사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며, 그 숭고한 독립정신을 추앙하는 바이다.

한편 한 집안 3종간인 고평(高平) 장군이 대한광복단 본부(중국 북간도 연변 왕청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활동을 했다. 실제로 고광계 의사의 모친(안성녀)께서 평소 고평 장군과 밀접하게 광복활동을 하였다고 그 정황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당시 “친일 한 집은 흥하고 독립운동가 집은 망했다.”라는 말이 동요처럼 떠돌았다. 의사의 집은 부친(고민상) 모친(안성녀)께서 2남 2녀를 두었다. 한학자로서 당시 훈장(訓長·서당 선생님) 강사료와 농가 소득한 돈은 모두 장남인 의사 고광계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여져 가정이 파탄되어 생활은 아주 곤궁하게 되었다.

‘광복운동을 하는 집’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의사의 부친(고민상)을 주재소 순사가 수시로 찾아와 집을 수색하고 연행하여 상서 주재소에서 조사를 하고, 부안 경찰서로 이송하여 강력한 조사를 받은 것이 수십 차례라고 했다. 어떤 때는 훈장 강의 중에도 연행하여 여러 번 조사를 받았으며, 이웃집에 사는 친척(최봉실 씨)을 연행하여 참고인조사를 몇 차례 받았다고 했다.

의사 (고광계)의 고향은 부안군 상서면 노적리 오지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 과거급제자가 11명이 배출된 마을이다. 성균관(成均館)에서 국가적으로 ‘으뜸마을’이라는 ‘인증서’를 발급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유교를 숭상하는 의로운 선비정신의 발로로 대한광복단에서 활동하게 된 동기라 했다.

의사(義士)고광계 부인(정성녀 鄭姓女)은 건강이 약하여 어지럼증을 앓고 있었는데, 특히 남편의 국내외 광복운동에 대한 염려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 되었다. 그래서 정신적 물질적인 고통이 더욱 심하였다. 그 기간 동안 아내의 간병마저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아픈 며느리는 시부모의 간병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의사의 슬하에 장녀(재숙 在淑)와 아들(죽촌 竹村)남매의 자손이 번족하여 자녀 손이 80여 명이 되었다. 고광계 의사는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비밀경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도망하던 중 압록강변 혜산진의 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사망(1943년 음 2월 12일)하니, 불행하게 객사를 한 것이다. 그나마 당시 광복단에서 활동하며, 친분이 두터운 친구의 도움으로 연락이 되어 고향인 부안 사창치에 가(假)장묘 하였다.

한 가지 더 아쉽고 원망스러운 것은 1950년 6·25와 9·28 수복 때 고향이 한국전쟁 제2의 격전지가 되어 낮에는 경찰, 밤에는 빨치산이 치안을 했다. 빨치산의 은거를 차단키 위하여 국군이 그 지역(청림리· 중계리)5백여 가옥을 불태워버렸다. 그 과정에서 대한독립운동에 관련한 근거 서류가 완전 소실되었으므로 국가 서훈의 절차가 힘들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운동 101주년을 맞는 올해는 의사(고광계)님의 독립운동 활동상황의 공훈을 인정하여, 나라에서는 서훈(敍勳)을 해 주기를 필자는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고재흠 수필가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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