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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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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 전민일보
  • 승인 2020.03.1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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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했다. 공부하는 소년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대통령과 어깨동무하고 사진도 찍었다. 활짝 웃는 모습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영상 앞에서 잠시 쉬었다.

카랑카랑하고 열정적인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드넓은 들판에 야트막한 산, 평평한 듯 너른 부엉이바위, 드높은 저 하늘에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 우렛소리처럼 들렸다.

1월의 끝머리는 아내생일과 맞물린다. 콧바람을 쐬자며 포항을 자청했다. 작은딸은 한동대학교 법학부를, 큰딸은 총신대학교를 마치고 한동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을 동시에 다닌 적이 있다. 그때부터 포항을 다니면서 가까워진 동네다. 거대기업인 포항제철이 일찍 자리를 잡은 탓인지, 도시는 늘 깔끔하고 동쪽의 ‘해맞이공원’이 탐나던 곳이었다. 고운 모래 가득한 해변은 낭만이 깃들고, 밤마다 제철에서 쏟아내는 형형색색의 조명이 별나라에 온 듯했다.

이번의 포항 길은, 붉은 게를 무한리필 해주는 유명한 식당이 있어서다. 값도 저렴하고, 늘 잡아오는 게라 살이 통통하고 맛이 별미란다. 임이야 곁에 있지만,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심정이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아내가 노래를 시작하면 나도 따라 부르면서 흥미진진하게 포항에 갔다.

웬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겉 바다는 멀쩡한데 속바람이 풍랑을 몰고 와 이틀 전부터 출항을 못했단다. 그냥 사와서 해도 좋은데 ‘그럴 수 없다’는 말에 진심이 묻어났다. 이튿날의 기대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무한리필은 다음으로 미뤘다.

1월 30일, 집으로 오는 길이다. 아내의 간청으로 ‘봉하마을’에 들렀다. ‘노무현대통령생가’ 표지판이 반짝이는 순간 울컥했다. 실은 노 대통령을 좋아하긴 했어도 애달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거일이 2009년 5월 23일인데, 이제야 갔겠는가?

그 세월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니 ‘노 대통령 열성팬들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을 훔쳤다.

아내를 힐끔 쳐다 보니 역시 눈물을 닦고 있는게 아닌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우리 스스로도 놀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기가 봉하마을’이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노 대통령은 봉하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진영읍내까지 1시간 남짓을 걸어서 다녔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권양숙 여사와 사랑을 키우며, 사법시험을 준비한 곳도 봉하마을이다.

퇴임 후에는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안고 고향마을로 내려왔다. 주민들과 오리쌀을 비롯한 친환경농업을 시작했고, 마을을 찾는 분들의 농촌체험을 위해 장군차나무도 심었다.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며 화포천에 나가 몸소 쓰레기를 치웠다. 노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진보의 미래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고 연구했다.

봉하마을의 산과 물, 흙과 돌 하나하나에는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노무현 대통령의 꿈이 어려 있음을 안내책자가 알려 주었다.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유난히 책 한 권이 방긋 웃고 있었다. “노무현의 사람 사는 세상” 어록 집이다. 노 대통령의 말에 매력을 느끼던 터라 냉큼 샀다. 사람들은 ‘많이’란 말을 즐긴다.

‘돈을 많이 가졌다. 학문을 많이 익혔다. 거물급을 많이 안다. 세계여행을 많이 다녔다.’ 강자의 과시용이다. 허나 노무현은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나도 목회할 때는 약자를 많이 살폈다. 그런 것들의 공감에 가슴은 더 미어졌다.

이런 대통령의 보폭을 어찌 글로 다 쓰겠는가? 생가를 다녀온 소감일 뿐이다. 여기 공감하는 글을 소개하고 ‘봉하마을’을 떠나련다.


“저는 대통령이 되기 전,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로 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힘있는 국민의 목소리보다, 힘없는 국민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체질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운영할 때는 그 누구에게 혹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수 없습니다. 중심을 잡고 오직 국익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중심을 잃는 순간, 이 나라는 집단과 집단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통치는 다릅니다. 비판자와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이라는 중심을 잡고 흔들림 없이 가겠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것은 권력을 누리고 위세를 부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정치가 바뀌어야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행복해진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어록 집, P171/ 2003.10.13. 제243회 정기국회 시정연설에서)

한성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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