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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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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복
  • 전민일보
  • 승인 2020.01.29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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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내가 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부러 일을 만들지는 않는다. 나는 일을 찾아서 하는 타입으로, 장차 할 일을 미리 해두는 편이다.

일복에 비해서 식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예전 직장의 어느 상사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서 후임자에게, 김 아무개 배꿇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을 많이 하는 머슴에게 밥을 많이 주듯 밥이라도 사주라는 당부였던 듯 싶다. 일복은 있는데, 먹을 복은 없다는 지적 같아 씁쓸하다.

반대로 먹을 복은 타고났지만, 일복이 없어 빈둥대는 사람도 있다. 실업자, 청년 백수가 이에 속하지 않을까?

나는 일을 빨리해치우는 성격이다. 오래 묵혀두고 되작거리질 못한다. 어찌 보면 참을성이 부족한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숙제를 받으면 집에 돌아와 먼저 해결하고 노는 편이다. 아이들이 실컷 놀고 피곤하여 숙제하다 잠든 모습을 보면 이해가 안 되었다. 자연 일에 중독된 사람 같이 일을 찾아 나서곤 했다.

아마 내 아래 직급에서 근무했던 동료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라 생각된다. '저 사람이 오늘은 또 무슨 일을 벌여 놓을까?' 하며 전전긍긍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내 별명은 멍게다. 해산물인 멍게의 이미지와 무엇이 닮았는지 모르지만, 직장을 옮겨 다니다보니 어디선가 따라붙었다. 요즘은 멍게를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해석한다.

모 대학 교수가 리더십의 유형으로 똑게(똑똑하고 게으른)가 가장 이상적이며, 멍부(멍청하고 부지런한)가 꼴찌라고 했는데, 멍게는 똑게와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의 다음이라고 한다.

멍청하므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자꾸 메모해두는 습관이 생겼고, 게을러서 그날 일은 그날 마쳐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래서 남들에겐 멍청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은 사람으로 비쳤는지 모르겠다. 나는 원래 멍게였다.

노인복지관에 나가다 보니 한두 가지 일이 늘어나고 책임이 커졌다. 아내는 절대 반대다. 감당하지 못할 일은 처음부터 단호하게 거절하란다. 나도 그러고 싶고, 남들에게는 그렇게 충고한다. 나보다 연조가 높은 분들이 하던 일을 매정하게 못하겠다 털어버리는 것도 도리가 아닌 성싶어 우물쭈물하다가 덜컥덜컥 일을 맡는 것 같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왜 못하겠는가? 일이 수월하다 해도 두 가지 중 하나는 충족되어야 한다.

돈이 되거나 보람을 얻어야 한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돈이 될 일은 찾기 힘들다. 근천을 떨며 머리를 들이밀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보람을 얻어야 할 게 아닌가? 힘껏 일은 해놓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이까짓 것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면, 마음고생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어 더욱 화기치민다.

한편으로 챙겨주는 신뢰가 고맙기도 하여, 슬그머니 익으 받아들이고 말아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A노인복지관 수필반 수업이 시작되었다. 작년에 총무를 맡아오다, 올해는 이 일을 떼어낼 것으로 여겼는데, 웬걸 반대표를 맡게 되었다. 36명의 작은 집단이라고 하겠지만, 일도 하기 나름이다. 전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이것저것 되작여보니 이것도 일복이라 생각하며 수용키로 했다.

더하여 D문학작가회와 Y수필전북지역 임원까지 맡으니 곱사등에 짐이 한 짐이다. 얼마 전에는 지방신문 도민기자에 위촉되었으니 어찌 헤쳐나갈지 은근히 걱정된다.

죽으면 원 없이 쉬고 잘 것인데. 뭐 그리 편안함을 구하느냐고 책하는 사람이 있다. 옳은 말이다. 적당히 건강을 돌보면서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타고난 일복은 어찌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집 밖의 일은 잘 챙기면서도 집안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는 나쁜 습성이 쉬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세탁기도 돌리고 진공청소기도 돌리면서 활기차게 일을 해야할 텐데. 전기밥솥에 쌀을 얹히고 구수한 밥을 해서 아내 앞에 내동을 날을 기다린다.

김현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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