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의 단상”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완주군협의회장 남 상 훈
그날도 오늘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옛날 학창시절 겨울 등반에서의 느낀 감동과 경이로움은 오랜 세월,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슴에 남는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지리산 계곡 어디쯤이라 여겨진다. 하루 고된 산행의 피곤함을 화전민이 살고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 의탁했다. 생전 처음 자기 집 손님이라며 기꺼이 안방을 내어주던 주인 내외의 친절함이 여간 고마운게 아니었다. 화전을 일구며 틈틈이 주워 모았다는 알밤이며 겨울나기로 아끼고 아끼던 옥수수와 고구마를 푸짐하게 내놓으면서도 못내 손님 대접이 소홀하다며 미안해하는 주인 내외의 따스한 마음으로 허기를 달래자. 이내 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 문풍지의 새찬 울음소리에 산골 겨울밤은 깊어만 가고 밖에는 산바람 속에 함박눈이 어지럽게 내리고 있었다.
창호지 문틈으로 밝은 아침햇살이 요란한 산새 울음은 불러올 때쯤에야 상큼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의 피곤한 산행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일행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방문을 열고나선 뜨락엔 바람 한점 없는 거대한 겨울 산이 온통 하얀 백설 속에 빠져 있었다. 장엄하다 못해 차라리 경외감으로 속세의 모든 더러움과 분진을 떨쳐버린 신비스러움이 거기 있었다. 산새의 발자국도 사람의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눈의 나라, 먼 태고의 색깔이 바로 흰색이라 했던가. 산과 들 온통 흰색뿐인 것 같다. 눈부시게 새하얀 겨울 아침,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면 “단지 흰색만으로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을까”하나님의 능력에 새삼 감탄할 뿐이었다. 한 아름 흰눈을 이고 있는 소나무 아래 산꿩 한 쌍이 먹이를 찾? ? 산비둘기 나래 짓에 부서져 내리는 눈보라가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풍경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겨울날의 풍요로움으로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는다.
이렇게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사람이 살아가는 것 또한 하얀 종이 위에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진하게 묻어난다. 낙서되지 않은 하얀 화선지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그러나 더러워지고 낙서된 화선지엔 아무것도 그려 낼 수 없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마음이 욕심과 세속의 영욕으로 더러워지면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그려 낼 수가 없다. 누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자기가 원하고 뜻하는 데로 삶의 밑그림을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결국“좋은 그림을 그려내느냐 못 그려내느냐”는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만 남는다.
삶이란 어쩌면 눈 쌓인 겨울 산하(山河)처럼 살아가는 동안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갈 수 있는 눈과 같이 하얀 화선지를 한 장, 한 장 마련해 나가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 년 365일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일상의 생활이요 그려진 그림이 차곡차곡 쌓여져 가는 것이 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라면 남은 삶은 눈과 같이 깨끗한 순백의 화선지를 매일매일 준비하는 일 또한 아름다운 삶을 역어가는 중요한 일과가 아닐 수 없으리라. 이미 넘겨진 그림이 잘못되었다, 후회하고 가슴아파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제의 상한 마음이 오늘을 더럽히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지금 창밖에는 소리 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내 마음은 먼 젊은 날의 잊혀진 추억을 찾아 길을 떠난다. 나는 오늘 어떤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