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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일보
  • 승인 2018.11.0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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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을인데 벌써 바람이 스산하다. 오늘은 영하권으로 내려가서 눈발이 보일 거라는 일기 예보 탓인지 자꾸만 하늘을 살피게 된다. 그러다 잠시 기지개를 펴 보기도 한다. 구름이 잔뜩 찌푸려 어두워지는 날이면 언제부턴가 관절이 쑤셔 몸을 더 움츠리게 되는 탓이다. 이런 날 자꾸 몸이 땅 속으로 꺼지는거 같아 조끼를 더 껴입어야 한다.

조금 전 일어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침대가 자꾸 눈에 밟힌다. 뱀이 제 허물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구겨져 있는 이불을 조금 먹먹하게 바라보니, 내 몸이 빠져나온 그 구멍이 다시 오라고 날 부르는 거대한 동굴의 입 같다.

가만히 다가가 다시 이불 구멍에 몸을 넣어본다. 따뜻한 온기가 반갑다. 그래, 어려서는 누가 이렇게 안아주고 토닥거려주면 잠을 잘 잤지. 지금도 그렇다. 이불과 베개에 거친 얼굴을 좀 부비다 보니 금세 낮잠이 든다.

요즘 들어 자꾸 몸이 늘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리 관절이 아픈 것도, 쪽잠이 많아지는 것도, 가만히 앉아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도. 아내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이제 노인이라서 그렇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사실, 노인이라는 말이, 늙었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퇴임을 할 때쯤에는 내심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아직도 더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데. 오랫동안 일한 노하우로 더 훌륭하고 사려 깊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데 이제 정년이 되었으니 그만 쉬시라는 말인 것 같아, 후배들의 축하도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보니, 그 마음은 그저 교만이라기보다 더 쓰임 받지 못함에 대한 섭섭함이었던 것 같다. 평생을 나를 필요로 불러주는 사람으로부터 존재 가치를 느껴왔는데, 이제 그만 쉬라는 소리가 그렇게 섭섭하고 고까울 수가 없었다. 난 아직 더 일할 수 있는데. 퇴직 후 신학대를 다녀 목사 안수를 받았던 것도, 내가 가진 재능으로 신께 조금 더 쓰임 받고 싶었던 마음이었겠지.

얼마동안은 노인이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만 65세라는 글귀도.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나를 노인의 영역으로 규정해 두고, 요즘 사람들과는 생각이 다르다고, 세상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늙은 사람이 아닌 ‘구식 인간’ 취급을 받게 될 것 같아 먼저 노여움이 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老’라는 말에는 늙고, 쇠하고, 늙어서 일을 그만둔다는 뜻이 있다. 아마 그렇게 노인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 까닭은 늙기도, 쇠하기도, 늙어서 일을 그만두기도 싫어서였을 테다. 인간의 삶을 줄여 생로병사라 한댔다. 그렇다면 늙어가는 것도 일종의 신의 축복일 수 있는데, 지금 나는 그 과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계속 두드린다. 아직 단풍이 다 들지도 않았는데 어떤 나무는 거센 바람에 못 이겨 나뭇잎이 다 밑동에 낙엽으로 떨어져 버린 것도 있다. 가만히 나뭇잎을 내줘버린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쓴 입맛을 다셔본다.

그래, 이런 게 인생이겠지. 늙고, 병들고, 그래서 이맘때는 다리도 좀 쑤시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많은 날을, 어리고, 젊고, 어른이었다가, 또 늙어가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모두 살아낼 수 있는 것도 누구나에게 허락되는 축복도 아니지 않은가.

오늘은 노인에게 허락된 날을 좀 즐겨봐야겠다. 따뜻한 이불에서 낮잠도 잤다가, 가만히 창밖도 구경했다가, 또 할 일이 없으면 허송세월도 조금 보내봐야지. 그리고 아내와 서로 늙었다며, 노인들끼리 시시한 농담도 빠질 수 없겠다. 조금 스산하지만 정취있는 가을처럼, 우리의 노인의 날도 충분히 멋질 수 있다고, 브라보!

김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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