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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일보
  • 승인 2018.08.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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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 나영이는 어른의 말이 기대에 한참 벗어나면 ‘헐’하고 반응한다. 처음엔 무슨소린지 몰랐다. 아이들의 은어겠지 짐작했다. 인터넷을 찾았더니, ‘어이없다, 놀랍다’라는 뜻으로 초중고생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경험을 했을 때 쓴다고 했다. 허虛와 얼(정신)의 합성어로‘정신이 나갔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몹시 놀라거나 숨이 찰 때,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때 나는 소리 ‘헉’에서 변영된 게 아닐까? 아이들이 ‘헐’하며 어깨를 들어올릴 땐 자연스럽게 보이는데, 내가 ‘헐’해보면 어색하다.

무슨 일이 영 꼬였을 때, ‘제길 헐’하고 내뱉는데, 이 말에서 ‘헐’이 나온 게 아닐까 싶어 국어사전을 찾았더니, 제길 헐은 ‘제기랄’에서 잘못 변형된 말로 ‘마뜩찮거나 실망한 때 불평스럽게 내는 소리’라고 풀이했다.

TV에서 가끔 듣는 ‘심쿵’이란 말이 무슨 뜻이지 궁금했다. 또 찾아보니 심장이 쿵할 정도로 놀람을 이르는 말이라 적혀있다.

열정이 있는 젊은이에게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이리라, 내겐 심쿵한 일이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으므로 뜻을 잘 몰라도 괜찮을 것같다.

그 외에도 돌아온 싱글을 줄인‘돌싱’은 이혼자를 일컫고, ‘훈남’은 보고 있으면 훈훈해지는 남자를 줄인 말이라 한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흐뭇하고 따뜻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남자라는 뜻이다. ‘상남자’에 해당한다. 나도 젊은 시절, 요즘 같으면 훈남소리를 들을 만하지 않았을까? 아내에게 물으니 애들처럼 ‘헐’하고 눈을 흘긴다.

‘뇌섹남’은 뇌가 섹시한 남자로, 주관이 뚜렷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유머가 있고 지적 매력이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고 한다. 완전히 소중한 남자를 줄여 ‘완소남’, 인기가 많지만 이미 결혼한 남자를 ‘품절남’, 차가운 도시 남자를 ‘차도남’, 남자다운 남자를 ‘마초맨’이라 한다는데, 나하곤 거리가 먼 외계어일 따름이다.

요즘은 혼자서 먹는 밥을 ‘혼밥’, 혼자 마시는 술을 ‘혼술’이라해서 유행을 타고 있다. ‘나 홀로 족’이 유행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 하다. 젊은 시절 술이 생각나면 이리저리 연락하여 술꾼을 모았던 기억이 새롭다. ‘혼술’이라니 정말 끔찍하다.

얼마 전부터 선생님을 줄여 ‘샘’, 미국 드라마를 ‘미드’, 열심히 공부한다는 ‘열공’, 깜짤 놀란다는 ‘깜놀’, 즐겁게 감상한다는 ‘즐감’들이 줄인 말로 유행을 탔다. 이성 친구는 여친, 남친, 절친이라 부른다. ‘먹방’은 먹으면서 하는 방송이고 ‘멘붕’은 멘탈붕괴의 줄인 말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경우를 이른다. ‘엄친아’는 엄마 친구의 아들로, 자신보다 잘난 남자를 말한다. 이렇게 줄인 말은 조금 알아들을 수 있다. 그밖에 환상의 궁합이라는 ‘치맥’은 치킨과 맥주를 일컫고, ‘번개팅’은 갑작스러운 만남을 뜻한다.

암호와도 같은 젊은이들의 언어 파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국어학자들이 염려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의 대중화와 스마트 폰의 확산에 기인한다. 나날이 늘어나는 신조어, 축약어를 정리하고 다듬는 일은 누가 해야 할까?

많은 사람이 표준어처럼 생각하는 단어도 있다. 얼굴이나 몸매가 좋다는 얼짱, 몸짱에 알바, 야자가 있고, 학생들을 가리키는 초딩, 중딩이 있다. 당연하다는 ‘당근’, 강력히 추천한다는 ‘강추’, 고되고 힘들다는 ‘빡쎄다’ 정도는 어른들도 곧잘 쓰는 단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헬조선’은 지옥 같다는 뜻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기성세대를 비꼬는 말 ‘노오력’도 눈에 띈다.

말은 유기체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 탄생과 성장, 그리고 쇠퇴와 사멸의 단계를 거치기도 한다.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난 신조어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청소년의 독특한 문화로서 이해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신조어가 너무 범람하는 것은 우리말을 거칠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글을 읽고 ‘헐’하며 눈을 크게 뜰 손녀의 귀여운 얼굴이 떠오른다.

김현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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