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3-29 01:40 (금)
빗방울전주곡과 시냇물에의 감사
상태바
빗방울전주곡과 시냇물에의 감사
  • 전민일보
  • 승인 2018.07.06 0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안 보스트리지 내한 공연에 다녀왔다. 영국 출신의 성악가인 이안 보스트리지는 이 시대 최고의 테너 중 한 명으로 지명도가 높다. 지성과 실력을 두루 갖춘 독일 가곡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캠브리지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안보스트리지는 ‘노래하는 인문학자’로 불리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성악을 잊지 못해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경력을 뒤로 하고 직업 성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29세의 나이에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정식 데뷔한 이후 첫 음반인 슈베르트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로 그라모폰 솔로 보컬상을 받았다. 또한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음반은 그라모폰 베스트 솔로 보컬상을 수상하는 등 주요 음반상을 석권했고, 그래미상 후보에 무려 15차례 오른 실력자이다.

그동안 음반을 통하여 이안보스트리지의 맑고 투명한 미성을 선호했던 나는 그의 육성을 현장에서 듣기 위하여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서울행 고속열차에 올라탔다. 서울시향과 함께 하는 이안보스트리지의 공연은 벤자민 브리튼의‘테너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녹턴’이었는데 무대에 선 그는 음유시인이 되어 세익스피어와 셀리, 테니슨의 시를 청아한 음색으로 노래했다.

이안보스트리지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문득 스물 두 살의 처녀시절로 돌아갔다. 36년전 스물 두 살의 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수틀에 바늘을 한 땀 한 땀 찔러 넣으며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즈의 피아노연주로 쇼팽의 24의 전주곡을 듣고 있었다. 그 중 제 15번 빗방울 전주곡이 연주되는 순간 내 마음 속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심연으로 방울방울 똑 똑 떨어지다가 점점 거센 빗줄기로 바뀐다. 빗줄기는 들뜬 신열과 마음속의 미진까지 씻어 내리며 이윽고 시냇물이 되어 푸른 하늘같은 마음의 시원(始原)으로 흘러간다. 푸른 하늘엔 솜털구름이 흐른다. 바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여 구름을 흐르게 할까? 화단의 초목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린다. 초록빛과 금빛이 뒤섞여 마냥 빛난다. 푸른 하늘과 진한 초록빛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짙은 슬픔을 나의 가슴에 음영으로 드리운다.

다시 가슴이 응어리진 채로 아파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아픔과 슬픔은 미지에 대한 그리움과 또는 대자연의 경이감에 대한 기쁨의 극치인 지도 모르지.

여고선배 언니는 나의 삶에 가장 소중한 전환기를 마련해주었다. 대학 3학년 때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특유의 알콜 냄새가 배어있는 하얀 시트가 깔린 병실침대에 누워 있었다. 폐결핵이 심해져 늑막에 물이 차오르는 늑막염까지 겹치는 바람에 학업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1년의 휴학계를 내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언니는 병문안을 오면서 꽃다발 대신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예쁘게 포장하여 들고 왔다. 카세트테이프엔 쇼팽의 24의 전주곡이라고 쓰여 있었다. 고전음악을 거의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병실에서 폐결핵과 싸우며 고독과 우울을 벗 삼아 지내던 나는 그 음악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빗방울전주곡은 1839년에 쇼팽이 폐결핵 요양 중 연인 조르즈 상드와 함께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 에서 지내던 때에 작곡한 것으로, 낙숫물을 묘사한 우울한 표현이 쇼팽의 초조와 권태를 반영하고 있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아마도 언니는 쇼팽처럼 폐결핵과 투병중인 후배를 위하여 선곡한 듯싶다.

나는 병실에 누워 빗방울 전주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마음을 비에 흠뻑 적셨다가 몸을 일으켜 창가에 앉아 여운처럼 스며드는 햇살에 말리곤 했다.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 후 집에서 안정가료를 하게 되었다.

휴학기간동안 자수(刺繡)로 마음을 한 땀 한 땀 채워가면서 빗방울 전주곡을 시작으로 한 고전음악과의 열애에 빠져들었다. 언니의 안내로 슈베르트와 슈만의 연가곡의 서정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여고시절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웠기에 독일어로 부르는 리트는 생소한 이국어의 느낌을 맛보여주었다. 딱딱한 음감을 가진 언어라고 독일어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 나는 깜짝 놀랐다. 괴테, 하이네, 아이헨도르프 등의 낭만적 서정시에 음악을 붙여 만든 리트는 연독(連讀)을 하며 노래하기 때문에 정말 감미롭고 애절하며 부드럽고 초연하게 들려왔다.

20개의 가곡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중 네 번째 노래 ‘시냇물에의 감사’를 듣는데 바레 사알 소겐 마인 으로 들리는 가사가 나의 마음을 시냇물처럼 휘감아왔다. 나중에 원어 가사가 바르 에스 알소 게마인트(War es also gemeint) 라고 표기된 악보를 보면서 나는 아연실색했지만 연독(連讀)이 주는 아름다운 뉘앙스에 매혹되었다.

요즘 출퇴근길 자동차의 오디오에 이안보스트리지의 cd를 넣고 시냇물의 감사를 반복해서 듣는다. 빗방울이 방울 방울 떨어지다가 거센 빗줄기가 되어 그대와 나의 심연속에 시냇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치유(治癒)의 시냇물에 감사를 드린다

소현숙 전북도여약사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청년 김대중의 정신을 이어가는 한동훈
  • 신천지예수교 전주교회-전북혈액원, 생명나눔업무 협약식
  • 남경호 목사, 개신교 청년 위한 신앙 어록집 ‘영감톡’ 출간
  • 우진미술기행 '빅토르 바자렐리'·'미셸 들라크루아'
  • '여유 슬림컷' 판매량 급증! 남성 건강 시장에서 돌풍
  • 옥천문화연구원, 순창군 금과면 일대 ‘지역미래유산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