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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 도판 도자기’ 장인정신, 이명복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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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 도판 도자기’ 장인정신, 이명복 도예가
  • 송미경 기자
  • 승인 2018.06.17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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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세월동안 오직 흙과 불을 어루만지며 도자기 장인의 외길 인생
▲ 이명복 도예가
▲ 분청사기 
▲ 분청사기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던 도자기. 아마 그것은 ‘분청사기‘를 위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 탄생은 비록 청자시대의 몰락으로 인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도공에 의해서였지만, 이 후 역사적 격변 속에서 분청사기만의 찬란한 예술의 세계를 꽃피웠기 때문이다. 

투박하지만 자유로운, 화려하지 않지만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채 수백 년을 이어온 분청사기. 이 같은 역사적 배경과 모습은 어쩌면 우리 전북의 모습과 닮아 있는 듯 하다.

천년역사를 가졌지만 현대화, 공업화의 과정에서 밀려 존재감이 미약해졌던 전북. 하지만 이제는 대한민국 문화 수도이며 '예술의 고장'으로 거듭나면서 더욱 창대한 발전과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될 전북.
전북에는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각자 자신만의 문화철학과 사명감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가 그 독창적인 조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한국 도자 문화유산의 특별한 존재로 평가받고 있는 분청사기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다시 만들어가는 손길이 있다. 
 
‘도꼼’ 갤러리-도예체험학습장을 운영하는 이명복 도예가(55).
천년의 역사를 우리민족과 함께해왔던 분청사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회화와 조각의 접점을 찾아 벽에 거는 분청 도판을 만든 그의 사각형의 ‘분청 도판 도자기’는 장인정신의 새로운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35년 세월동안 오직 흙과 불을 어루만지며 도자기 장인의 외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의 삶과 작품을 살펴봤다. 
 
천년의 명성을 이어온 분청사기가 오늘날 그의 손길을 타고 현대적으로 다시 탄생하는 모습은 전라도 정도 천년을 맞아 도예예술분야의 새로운 역사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 /편집자
  
정읍 산외면에서 태어난 이명복(55) 도예가.
전주대 산업미술학과에 진학하며 도자기와 운명적인 인연을 맺었다. 대학원 졸업 후 고향인 산외면의 품에 안겨 도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빚어낸 분청사기엔 주로 고향에 대한 정과 그리움, 안타까움 등 다양한 형태가 작품 속에 담겨 있다. 
‘달을 삼킨 항아리’ 개인전에 내놓은 수십 여 점의 작품을 통해 속내를 여실히 드러냈다.
분청 상감기법을 활용, 달 항아리에 담은 하늘을 날고 싶은 물고기와 연꽃, 해초, 버들강아지 등을 그렸다. 약은 재유를 사용하고, 투박한 분청에 그 느낌을 표현했다.
 
‘달을 삼킨 항아리 작품’은 작품명이 의미하듯 바람과 바다와 하늘이 주는 다양한 안료(顔料)들을 이용, 다양한 색상으로 도판에 옮겼다. 
 
물고기를 품은 접시 작품은, 인간이 삶에서 자유를 누리려 하지만 자유롭지 못한 물고기처럼 접시 안에 사는 인생을 여러 가지 사각형태의 도판으로 표현했다. 또한 풍경이 있는 화병 작품은 오방색을 겹쳐 칠한 후 긁어내는 기법을 활용, 고향에 핀 꽃들과 들판, 하늘과 달,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들을 화병에 담았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이명복 도예가의 분청사기 작품은 분청사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돌아보게 한다. 전통의 정신을 몸으로 이어받고 그 속에 현대성을 녹여 넣는 혼신의 기력이 이들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내장도예’ 나희용 도예가를 찾아 배우기도 했다. 또 ‘도자기의 고장’으로 알려진 여주에 6개월 정도 거주하며 도자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계속했다.
 
수많은 수행착오와 깨달음을 반복하며 20여년 가까이 산외면 ‘도꼼’ 공방서 분청사기를 만들어 온 이명복 도예가는 전주로 공방을 옮기게 된다. 전주 모악산 근처에 가마터를 잡고 도예가로서의 제2의 삶을 꿈꾸게 된 것. 
고향인 정읍 산외에서 작업한 작품들로 마지막 전시회를 열어 그 의미도 되새겼다.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하고 원하는 작품을 빚어내기 위해 전통적인 장작가마터까지 만들었다. 
 
1992년 전주 얼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통해 대중들에게 다가선 그는 현재까지 14회의 개인전 및 400여회의 다양한 기획 초대전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4년부터 전주대 평생교육원 도예 강사로 활동하는 그는 전통 도예 문화를 계승하고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손으로 제작하는 도자기는 동시에 같은 분청 기법과 형태로 제작한다 해도, 100% 똑같이 만들 수 없기에 기성 제품과는 다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렇기에 작품 하나 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만들어가려고 노력 중이라고 한다. 
 
전주에 있는 갤러리 피크니크 개관기념으로 지난 5일부터 이명복 분청사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그 호응에 힘입어 올 가을엔 다시 개인전도 준비 중이다. 
 
이명복 도예가는 갑오동학미술대전, 전국춘향미술대전, 전북미술대전, 전국 무등미술대전, 경상북도 미술대전, 온고을 전통공예 전국공모전, 관악 현대 디자인 공예대전 운영위원, 대한민국 황실공예 지평선대전 운영위원, 전국온고을미술대전 심사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미술협회, 전북도예가회, 천잠공예가회, 전업미술가협회, 흙사랑회, 시대미술협회, 토목금 회원,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전국 무등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분청사기는=분청사기는 상감청자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 청자를 만드는 흙을 쓰고 상감기법에 쓰인 '백토(하얀 분가루 같은 흙)'로 무늬를 낸 뒤 유악을 발라 구워 낸다. 말 그대로 백토로 분장한 청자란 뜻이다.
이처럼 상감청자와 만드는 방법이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분청사기는 청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청자는 최고의 흙과 최고의 유약을 가지고 최고의 조건에서 만들었다. 불도 물도 흙도 한치의 오차도 없는 규격을 따라야 한다. 엄격한 관리 아래 최고의 전문가들이 빚어냈기 때문에 청자는 고려사회에서 쓸 수 있는 사람이 적었고 문벌귀족의 점유물이었다.
하지만 분청사기는 그렇지 못했다. 고려 귀족들의 몰락 이 후 먹고 살기 위해 도자기를 구워야 했던 도공들은 흙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유약의 질도 나빴고 땔감도 풍족하지 못해 가마도 만들 형편이 아니라 도자기는 제멋대로 구워졌다. 그래서 분청사기는 규칙도 없고 도공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고 자유롭다. 주 고객층도 고려 귀족에서 새로 등장한 신진사대부로 바뀌었기에 도공들은 이들을 공략해야했다.
성리학의 이념아래 매우 현실적인 사대부들은 제사나 의식 등을 위해 만들던 청자를 비웃었고 실생활에 유용한 도자기를 찾았다. 정신적 가치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던 성리학자들에게 도공들은 지극히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를 나타낸 듯한 기법으로 다양한 분청사기를 만들어 냈다.
 
질이 떨어지는 흙과 유약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하고 자유로운 무늬와 그림을 만들었다. 그 결과 분청사기는 규칙이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진 무늬가 조화를 이루며 마치 저잣거리에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떠오르는 듯한 자유로움을 간직한 현대미술품 같은 멋을 자아내게 된다.
 
송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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