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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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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 서서
  • 전민일보
  • 승인 2014.10.2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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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이 하루하루 황금물결로 변모하고 있다. 나는 고향으로 달려가 조부님의 터전에 서서 조부님을 추모해 본다. 조부님의 터전은 춘포면, 우리말로 부르면 봄 나루이다. 봄을 맞이하는 나루터!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렐 터전의 이름이 아닌가?

어느 날 빛바랜 앨범을 들추며 고인이 되신 조부님을 추모하다가 소화(昭和) 11년(서기 1936년)이라고 새겨진 사진 한 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조부님의 사진이었다. 사진속의 조부님은 약관(弱冠)을 넘긴 스물세 살 청년이셨다.

사진에 새겨진 소화라는 일본 천황의 연호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미래에 대한 꿈도 희망도 없이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농의 독자였던 조부님은 일제가 주관하는 농업강습을 마치고 단체사진을 촬영했었나 보다.

청년은 이른 봄에 농업강습을 받고 여름 내내 땀을 쏟아가며 농사를 지휘하고 가을 추수기에 이르러 미곡 증산을 했지만 그 쌀의 대부분이 강제 공출되어 일본으로 실려 갔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나라의 주권을 잃은 청년의 비애가 가슴이 아프도록 느껴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으니 내가 알지 못했던 조부님의 청년기의 아픈 생애를 들여다 본 것이었다.

농부의 피와 땀의 결실인 쌀이 어떤 길을 통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익산 인접 도시 군산에는 장미동이 있다. 장미동이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 넝쿨 장미가 아름다운 동네를 연상했다.

언젠가 군산지역의 근대문화유산 답사를 할 기회가 있어서 미리 자료를 검색하다가 근대문화 유산이 산재해 있다는 장미동의 유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장미동의 한자 지명에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장미는 장미꽃을 일컫는 장미가 아니고 장미(藏米)였다.

장미(藏米)라는 한자를 보는 순간 일제수탈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곡창지역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일제가 수탈하여 저장하였던 구역이 바로 장미동(藏米洞)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조부님들이 피땀 흘려 가꾼 옥토에서 생산된 미곡들이 이곳에 집하되었다가 일본으로 실려 갔던 것이었다. 이러한 수탈의 현장이었던 장미동에는 현재 근대역사박물관이 건립되어있다. 이 근대역사박물관은 일제수탈의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교훈의 장으로 삼자는 의미에서 건립한 것이라 한다.

나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봄나루 들녘에 서서 알알이 여문 벼이삭을 바라본다.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보내고 드디어 광복이 되어 그 농토에서 생산된 미곡으로 삶의 원동력을 우리 후손들이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한없이 인자하셨던 조부님의 자애로운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 하다.

내 고향 봄나루의 옥룡천(玉龍川)과 부상천(扶桑川)이 합류되는 익산천(益山川) 제방 길에서 워낭소리 딸랑거리는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시던 할아버지가 뵙고 싶다. 할아버지가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 외양간에 소를 넣을 무렵 나는 닭장으로 들어가 둥우리를 뒤져 갓 낳은 달걀을 찾아 할아버지께 드리는 다섯 살 난 손녀이고 싶다.

할아버지는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달걀의 양쪽 끝을 톡톡 깨어 들이키신 후 사랑채로 들어가서 음성을 가다듬어 시조 한 수를 읊곤 하셨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나는 지금도 확연히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시조창을 들으며 당신의 땅에서 수확한 쌀들이 더 이상 수탈당하지 않고 후손들의 삶을 이어가는 생명의 쌀이 되었노라고 고해드리고 싶다.

명절에는 축문을 읽지 않는 무축단헌(無祝單獻)이 관례이지만 나는 가을 들녘을 향해 유세차 계사 팔월 망 (維歲次癸巳八月望) 효손감소고우(孝孫敢昭告于)....상향(尙饗)이라고 축문을 낭독하며 마음속에 조부님을 모셔본다.

조부님은 자애로운 미소 가득 머금고 가을들녘을 서서히 걸어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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