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망(輿望)과 야망(野望)

2021-07-02     전민일보

요즈음에는 섭씨 40도를 웃도는 과열상태의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언제 어디서든 정치와 종교 이야기로 육담(肉談)과 삿대질을 해대는 풍경이다. 생각이 다르다 하여 큰소리로 윽박지르며 공격해대는 현상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좌뇌와 우뇌가 균형을 이루어 머리가 둥근 것은 원만한 인격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동글동글한 머리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인격체인 것이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 시장이나 공사 현장에서 나라를 걱정하며 정치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해결점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사소한 이야기지만 지도자들에게는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의가 아닌 논쟁으로 기울면 또 다른 걱정거리다. 둥근 머리의 반쪽만 발달했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는 나라의 안위를 위한 정책으로 백성의 신임을 받아야 하고, 종교 지도자는 신자의 안정을 위해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백성이나 신자가 나라와 종교를 걱정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절대 왕조 시대의 권력으로 일반 백성을 억누르던 오만을 아직도 답습하고 있는 까닭이다. 해방 이후 국민의 여망(輿望)과 여망(餘望)을 담아내지 못한 일부 권력층의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살벌한 나치에게도 과잉 충성하는 권력지향층이 있듯 국민의 뜻에 반하는 정치권에도 뒤따르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백성의 절실한 현안이 무엇인지 외면하여 지도자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가치와 워싱턴 대통령의 아름다운 선례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해바라기성 추종자들에 의해 잘못된 판단으로 국민을 흑백논리의 틀에 가두어 놓았다. 한발 물러서서 양쪽의 장단점을 절충하려는 화합의 노력은 ‘회색분자’라는 딱지로 몰아붙인다. 분명한 노선의 흑백논쟁으로 국민을 양분시킨 것이다.

공자는 『공자가어』에서 노나라 애공에게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물과 배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무릇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夫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所以載舟, 亦所以覆舟)’는 이 말은 정치를 잘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갈아치운다는 혁명의 가능성을 경고했다.

시대가 바뀐 현재에도 그 가르침은 적용된다. 권력을 맛본 사람들에게 권력의 속성을 잘 파악하라는 경고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재주복주(載舟覆舟)는 정치권에 주는 명언으로 회자된다.

조선말기의 혼란과 일제강점기의 억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권력자들은 기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왕권시대의 절대권력에 익숙한 상황에서 근대적 공화정치의 틀에 맞추다보니 해방 이후의 정치는 가히 논쟁의 불구덩이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왕당파와 혁명파가 대결하여 상대방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듯 극단적 친일파도 권력의 핵심으로 불러들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그렇게 창출한 권력이다 보니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결은 기득권자와 구국세력권의 투쟁으로 변질되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의 현상으로 이 당에 흑백논리의 뿌리를 내린 것이다.

꿈에는 여망(輿望)과 야망(野望)이 있다. Ambition을 야망이라 하여 무엇인가를 이루어보겠다는 꿈의 긍정적 면으로 사용한다.

‘Boys be Ambitions’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웃과 더불어 이루고자 하는 꿈이 여망(輿望)이라면 남보다 우뚝 솟으려는 개인적 꿈은 야망(野望)이다. 그래서 야욕(野慾)이라 하지만 여망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대하고 바라는 꿈이기에 영어에서도 신뢰(confidence) 기대(expectation)라 한다.

흔히 말하는 야망은 누구나 지녀야 할 장래의 꿈이지만 권력이나 경제의 경우에는 부정적 측면이 많다. 그래서 야망이 클수록 언어가 화려하고 적극적이며 목표 지향적 행동이 대범하다. 그래서 정치인과 경제인의 야망은 정점에 오르기 위한 행보라서 오만과 자만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존경받는 지도자를 동상으로 세워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구(西歐)의 광장이나 동남아의 큰길 로터리에 우뚝 서있는 동상은 우리의 시선을 유혹한다.

우리는 이미 세워 놓은 동상마저 철거하는 상황이라서 저들의 동상들이 위대해 보인다. 우리도 케네디 공항과 같이 인명을 공공기관명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행여 여당은 여망(輿望)이고 야당은 야망(野望)이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을까.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실에서 용어의 선택조차 조심스럽다.

삿대질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며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선진한국의 내일은 언제일지 아득한 여망(輿望)을 기대해 본다.

강기옥 시인,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