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상종의 허실

2021-04-23     전민일보

권력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울릴 때 큰 힘을 발하고, 경제는 경제력이 있는 자들이 협력할 때 더 큰 효과를 이룰 수 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의 긍정적 상승효과다.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한 끼리끼리의 어울림은 민생의 가치를 전제한 공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하늘에 근본을 둔 자는 위를 친애하고, 땅에 근본을 둔 자는 아래를 친애한다’는 천애(天愛人)과 지애인(地愛人)으로의 분류는 끼리끼리의 어울림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다.

“무릇 동류(同類)는 동류끼리 서로 모이는 것이니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 물은 젖은 땅에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번지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성인이 나타나면 온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

『주역』 건괘(乾卦) 다섯 번째 효(爻)의 이 문장은 자연현상과 인간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만민이 우러러보는 조건을 갖춘 자라야 한다는 점이다. 풍운지회(風雲之會)는 이 문장의 ‘운종용 풍종호(雲從龍風從虎)’에서 나타난 성어다. 용과 호랑이가 풍운을 만나야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훌륭한 군주는 현명한 신하를 만나야 한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밝힌 것이다.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는 전제처럼 ‘성인이 나타나면 온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는 결론으로 군주의 자격을 중시했다. 신하보다 군주의 덕을 강조한 것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시대에 맞는 가르침이다. 현신(賢臣)들을 파리 죽이듯 폭정을 일삼는 폭군 앞에서 풍운지회에 대한 기대는 언감생심이다. 연산군만 하더라도 김처선의 충언에 잔인한 죽임으로 입을 막고 신언패(愼言牌)를 목에 걸게 하는 상황에서 신하의 인격을 먼저 거론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래도 세종과 황희, 유관, 맹사성의 만남, 정조와 채제공, 정약용의 만남은 조선시대 풍운지회의 꽃이다.

이 경우도 명군(明君)과 현신의 관계는 항상 명군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권신들은 백성을 착취하여 경우가 많았다.

당태종 이세민은 아버지를 압박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는 패악을 저질렀는데도 황제가 된 후 결단력이 뛰어난 두여회, 기획력이 빼어난 방현령, 강직한 충언의 위징을 만나 정관의 치를 이루었다. 절대 군주는 저승사자일 수도 있고 선량한 어버이일 수도 있는 풍운지회의 대표적인 경우다. 결국 유유상종의 풍운지회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것이 요즈음에는 부정적인 용어로 바뀌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거나 ‘끼리끼리’라는 비아냥으로 타락한 사회상을 풍자한다.

BC400년 경 제나라 선왕에게 순우곤이 한꺼번에 현신 7명을 추천하자 너무 많다고 했다. 이에 순우곤은 새도 같은 무리가 떼지어 살 듯 인재도 마찬가지라며 유유상종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군주가 바른 정치를 위해 현신을 모으는 과정에서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는 끼리끼리 문화, 패거리 문화로 변질되었을까.

정점에 오르거나 금배지만 달면 귀가 먹는다는 정치인, 충신의 간언도 외면하고 아예 듣지도 않는 풍토가 문제다. 아니 김처선이나 위징 같은 간관(諫官)의 존재감이 없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공자는 다섯 가지의 간언을 제시했다.

휼간(譎諫) - 은근히 돌려 완곡하게 간하는 방법.
당간(戇諫) - 꾸밈없이 대놓고 고지식하게 간하는 방법.
항간(降諫) - 자신을 낮춰 겸손하게 간하는 방법.
직간(直諫) - 정면에서 정곡을 찔러 곧이 곧대로 간하는 방법.
풍간(諷諫) - 풍자하여 완곡하게 빗대어 간하는 방법.

간언으로 자신의 몰락을 불러올 수도 있기에 군주의 성격에 따라 간하는 방법을 달리할 수도 있다. 우유부단한 군주에게는 직간이 적절한데 위징은 강직한 이세민에게 과감히 직간했다. 이세민 역시 이를 수용한 용단이 있었기에 명군이 되었으나 연산군은 김처선의 직간을 무시했기에 군주에서 쫓겨났다.

풍간을 좋아한 공자를 존숭하던 조선, 이제 그들의 여유는 어디 갔는가. 곳곳에 양극화를 부추기는 정치인들은 초심을 찾아야 한다.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을 풍운지회의 상징으로 여기는 선례를 따라 살만한 세상으로 바꿔가기를 직간(直諫)한다.

강기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