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언행록(言行錄)

2021-02-17     전민일보

몇 해 전 성인지감수성 관련 강연을 들었다. 그 중 인상 깊었던 것은 강사가 언급한 동춘당송준길(同春堂宋浚吉)에 관한 것이다.

페미스트 입장에서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성리학자가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다만, 궁금했던 것은 그가 아는 송준길은 어디까지일까에 대한 것이었다.

문화혁명(文化革命) 당시 중요 척결 대상 중에는 공자(孔子)도 있었다.

공자야말로 반동(反動)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생각한 이상향은 주공(周公)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개혁군주라는 정조(正祖)가 꿈꾸던 세상이기도 하다.

페미스트 강사가 알고 있는 송준길의 모습이 홍위병의 눈에 비친 공자 수준의 그림이라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정조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찬사만큼이나 검증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다만,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면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찬사와 비난도 열린 결말을 통해 여정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봉건제를 옹호하는 반동적(?) 인물 공자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중심에 『논어(論語)』가 있다. 공자(孔子)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유념할 것은 우리가 앞선 세대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권리만큼 후세에게도 동일한 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공자와 『논어』에 대한 평가는 수 천 년을 이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불과 한 세대를 살 뿐이다. 관련해 조선과 그 이전 시대 인물을 오늘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현대인에게 매력적인 인물은 공자나 정조가 아닌 마르크스(Karl Marx)가 극찬했던 스파르타쿠스(Spartacus) 유형이다. 한국사의 만적(萬積)이 그렇다.

다만, 만적을 역사에서 복권시키는 것과 『논어』의 생명력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비판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은 충분하다.

그것은 헤로도토스(Herodotus)에게 가해졌던 비판이 후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사에도 언행록이 남아있다. 그중 인상 깊은 것은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이다.

퇴계 이황(退溪李滉)은 조선 시대 당파를 초월한 성현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서인(西人)의 종조인 우계 성혼(牛溪成渾)과 율곡 이이(栗谷李珥)도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지극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비판 역시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중요한 근거로 인용되는 것 중에 그가 남긴 많은 편지들이 있다.

그 속에 있는 퇴계는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봉건지주이자 군역을 피하는 현실적 방법에 대한 얘기까지 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유념해야 할 것은 대부분의 인물은 패러다임 범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단 퇴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망라한 보편적 한계성이다. 스파르타쿠스나 만적 같은 인물이 오늘날 재평가되는 것은 그런 한계에 도전해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려 했던 데 있다.

『퇴계선생언행록』을 『논어』와 비교해 폄하할 이유는 없다. 『퇴계선생언행록』에 담긴 보편적 가치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32개 항목으로 되어있는 퇴계언행록엔 수많은 인물들의 증언이 담겨 있다.

우계와 율곡을 통해서 알 수 있듯 퇴계는 당파적 이해가 첨예한 조선에서 그것을 초월한 존재였다. 그의 인품과 학문하는 자세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커다란 울림을 전달하고 있다.

퇴계는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퇴계는 마지막 순간 “매화 분재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단정히 앉아 삶을 마감했다.

퇴계는 묘갈명(墓碣銘)을 스스로 썼다. 그 이유는 자신을 미화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나면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성해서는 병도 많았네.”로 시작해 “이제 자연의 조화를 타고 돌아가려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로 끝을 맺는다. 궁금하다. 후대, 이 시대의 언행록은 어떠할까.

장상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