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문

2017-02-01     전민일보

시인(詩人)을 꿈꿨던 나는 그 소망에 대한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시대의 모습을 운율의 리듬에 담아 펼쳐낼 통찰력도 표현력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세상과의 소통방식으로 글을 택하고자 하는 소망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수많은 고전을 읽고 주변과 일상을 떠나 세상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었으며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것도 결국은 글에 대한 것으로 귀결된다.

비록 독서와 여행 그리고 다양한 사람과의 교류라는 전제가 덜 충족 되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글을 쓴다는 것, 내겐 행복한 일이다.

그런 내가 정기적으로 지면에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준 것은 전민일보가 처음이다.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그 동안, ‘칼럼 100편을 쓸 수 있었으면’하는 바람은 어느덧 여러 매체의 지면을 통해 나간 글이 300편을 넘었다.

그 수많은 편린(片鱗)은 한 시대의 작은 울림인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심판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 중엔 얕은 지식의 한계는 물론 상호모순과 자기반성의 근거가 될 만한 내용도 있다. 안위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적어도 쓰지 말아야할 글로 역사와 독자에게 죄를 범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것이 어찌 없겠는가. 앞서 언급한대로 내가 쓴 글 중엔 상호모순을 담고 있는 부분도 있으며 사실에 대한 오류도 보인다. 그것이 비록 합당한 논리와 용인될 수준이라는 말로 변명할 수 있을지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또한 글을 통해 존경을 표했던 사람에 대해 후일 나 스스로 얼굴이 붉혀진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글에 대한 공적영역의 문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며 후일에도 변함없이 남게 될 것이다. 거기에 개인적 문제도 있다.

좋았던 인연이 내 글로 인해 불편해지거나 깨진 경우는 공적영역과는 분명 다르다.

곤혹스러운 사실은, 다양한 의견의 존재가 민주사회의 본질적 가치라는 당위성과는 별개로 현실에서 마주하는 다름에 대한 대처는 꼭 그렇진 않다는데 있다.

사안에 대한 방향성이 본질을 넘어서는 모습에선 과연 조선의 붕당(朋黨)과 대한민국의 정당(政黨)은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대한민국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정의는 단일한 합리성의 범주에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가지고 보수와 진보를 얘기할 수 있을까. 노론(老論)과 남인(南人)중 과연 누가 보수이고 진보인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보수와 진보라는 양 진영에서 요구하는 적시된 방향성이 때로 그들이 내세운 전제와 모순되는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에 요구하는 방향성이 불편하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생전 이런 말을 남겼다.

“소크라테스와 오후 한 나절을 같이 보낼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기술 모두와 바꿔도 아깝지 않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말이 아닌 글을 통해 철학을 향유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글 한 편 남기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제자 플라톤의 기록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역설적이지만 스티브 잡스가 그토록 열망했던 지혜의 당사자는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 뿐이다.”

삶의 근본적 질문에 대해 완벽한 대답을 해 줄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앞선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이 사회에 던지는 시 한 구절에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시대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에게 선물로 꽃을 선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한다. 중국인은 꽃을 통해 ‘짧은 생명’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떠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과일 배 보다는 ‘평안함’을 의미하는 사과를 선물로 선호한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내 글은 ‘중국인의 꽃이나 과일 배’와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 돌아본다.

장상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