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 모든 것은 공(空)한 것이니

2016-04-07     전민일보

諸法皆空, 一切皆空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 ”

일본 에도시대에 료칸(良寬)이라는 선승이 있었습니다. 화가로도 유명하고, 만요슈(萬葉調) 풍의 노래를 잘 읊는 가인(歌人)으로도 유명했던 스님입니다. 그런 스님 암자에 나그네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먼저 발을 씻으시지요.”

늦은 밤에 손님을 맞이한 스님은 발 씻을 물을 떠다주었습니다. 나그네는 발을 씻고 저녁밥까지 잘 대접받은 뒤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그네가 눈을 뜨자, 이미 일어나 명상에 잠겨있던 스님은 바깥으로 나가 세숫물을 떠다주며 말했습니다.

“일어나셨으니, 세수하시지요.”

나그네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침인사를 하고는 세숫물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세숫물이 세숫대야가 아닌 솥에 담겨있는 겁니다. 나그네는 머뭇거리며 물었습니다.

“스님, 이건 솥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어제 발 씻은 물을 담았던 솥인가요?”

“네.”

“이 솥으로 어제 저녁밥을 지으셨고요?”

“물론이지요.”

“오늘 아침 밥도 이 솥으로 짓고요?”

“그러면 안 되나요?”

나그네는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요? 그리고 료칸 스님은 왜 그랬을까요? 어째서 스님은 솥 하나로 세수하고 발 닦고 밥이나 죽까지 지어먹는 걸까요? 지저분하게 말입니다. 그릇이라고는 솥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나그네를 놀려줄려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료칸 스님은 바로 공(空)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諸法皆空, 一切皆空)

료칸 스님은 공(空)을 깨달았기 때문에 솥 하나로 무엇이든 구애받지 않고 여유작작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발 씻는 그릇으로는 밥을 지을 수 없다며 솥 말고도 양동이며 세숫대야 따위를 사지 않을까요?

료칸 스님의 행위를 밥짓는 솥에 발을 씻으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스님은 사물을 분별하는 일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공이라고 해서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진정으로 공한 것은 묘하게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무시하거나 허무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텅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지요.

박인선 부동산학 박사, 전주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