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와 정분나기

이분남 수필가

2014-07-25     전민일보

퇴직을 하였다. 드넓은 대양에서 서서히 밀려나 모래톱이 꺼끌꺼끌 마음을 핥는 해변의 가장 얕은 가장자리에 선 것이다. ‘나’라는 가치기준은 한낱 나이로 평가 될 것이며 내재된 그 무엇도 별반 내세울 만치 인정받지 못하니 좀 허전하다.

벗할 변변한 이 하나 없기에 더욱 걱정이다. 푼푼한 성품이라야 눈인사를 나누던 이웃들과 수다라도 떨겠지만 낯가림 성격에다 수다 자체를 즐기지 못하는 축에 끼다 보니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다.

나도 한 때 수다의 틈에 끼고 싶어 노력한 적이 있었다. 가까운 지인이 수다로 압박을 풀고 나면 위로 받게 된다고 등을 미는 바람에 함께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수다를 떤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째깍 소리를 높이며 독촉하는 듯해 난 그만 안절부절했다.

위로는 커녕 부질없이 가버리는 시간 때문에 결국 괜한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는 수다에 동참하질 못했다.

수다는 대화와 마찬가지로 소통일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친근한 방법의 대화가 수다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퍽 가깝게 만들기도 하고 아주 멀어지게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사전적 의미에도 수다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으로 되어 있고 대화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라고 되어있다. 수다는 인간 사이에 밀착된 언어이며 대화는 적당한 간격과 걸맞은 태도가 스민 언어라는 뜻이다. 격이 다르다는 말이긴 하나, 둘 다 사람 간의 소통방법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예를 중시한 대화보다 격식을 허문 수다가 때론 진실일 수 있겠다. 인간은 홀로 위로받기 어려운 동물이다. 서로 기대고 보듬어 줌으로써 완전해지는 것이 인간살이다. 내게 부족한 것을 이웃에게 위로받고 이웃의 부족한 부분은 내가 위로해주며 사는 것, 삶이 공평하다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누구를 폄하하는 수다에서 좀 더 타인의 조건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선행되는 수다로 방향을 전환한다면 대화보다 상위 수준의 언어는 수다가 될 것이다.

물씬 비가 내리더니 뿌옇게 날던 송홧가루가 황금빛 그림을 길 위에 그려놓았다. 거리를 두지 않는 자연이 떤 수다다.

나는 인간사에도 늘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적정한 거리에서 소통을 했고, 거리를 가까이 하고자 하는 이웃을 적정선 밖으로 자꾸 밀어내기만 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대화에 필요한 60cm의 거리를 허물고 징허게 씨울씨울 해뿌러야 수다와 情分이 날 텐데, 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