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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初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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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初心)
  • 전민일보
  • 승인 1970.01.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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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義士)가 형(兄)으로 호칭했을 만큼 신뢰했던 한 인물이 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일제의 밀정(密偵)이 된다. 독립투사로 알려진 그의 본 정체가 밝혀진 것은 ‘간도 15만원 사건’을 통해서다. 당시 15만원은 소총 5,000정을 마련할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거사는 성공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한 순간 절망으로 변해버렸다. 믿었던 한 인물에 의해.
 독립군 군자금으로 쓸 목적으로 일제로부터 탈취한 15만원과 함께 거사에 참여한 독립열사들을 엄인섭이 일제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결국 15만원은 고스란히 일제의 손에 다시 들어가고 엄인섭이 일경에 넘긴 열사들은 모진 고문 끝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된다.
 안중근 의사와 단지동맹을 맺으며 조국독립을 염원했던 그는 어떻게 일제의 주구로 변한 것일까. 사람들은 더 이상 엄인섭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중근에 대해서 그렇듯 엄인섭을 잊지말아야한다. 또 하나 엄인섭과 같은 인물은 생각보다 많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한 분이 생존해 있었다. 역사적 현장에서 조국 독립을 소리높이 외친 그 분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런데 어느 순간 들려온 소식은 존경을 깊은 회의와 실망으로 변화 시키고 말았다. 그에게 씌워진 너무도 깊고 아픈 혐의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떤 이는 내게 이렇게까지 얘기했다. “3?1운동과 소위 민족대표 33인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그분이 당당하게 얘기해주길 기대했다. “나는 역사와 조국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
 그럼에도 일제의 밀정(密偵)이라는 의혹에 대한 그의 변명은 너무도 구차하고 설득력이 없었다. 독립투사라는 그가 한국을 대표해 일본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 왜 많은 사람들이 탄식 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충분히 설명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주류에 속해있다. 진실에 대한 책임이 더 엄중해야 하는 이유다.  
 을사늑약으로 부터하면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강압통치는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엄혹하고도 긴 시간이다. 비분강개의 지조를 가지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장지연의 모습이 영원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너무도 많은 아까운 인물들이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져 간 것이 안타깝지만 지울 수 없는 역사이다. 흔히 나치하의 프랑스와 일제하의 한국을 비교하면서 역사청산을 얘기한다.
 감히 얘기하자면, 우리가 프랑스에게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나치하의 프랑스는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한국이 그런 상황이었다면 지금 보다 훨씬 많은 인적자산을 역사에 남겨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빛바랜 인물들이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이다. 일제의 폭압에 눌려 창씨개명(創氏改名)한 대다수의 민중을 비난할 수는 없다. 모두가 안중근, 윤봉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책임을 묻고 그것을 통해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책임질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그 개인에게 가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곳에 다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가지고 가야할 역사적 짐이다. 그 누구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누가 내게 ‘넌 그때 태어났으면 어땠을 것 같나’라고 묻는다면 나 역시 두렵다. 다만, 그 질문이 책임의 문제를 덮을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자신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엄인섭이 잃어버린 것도 바로 초심이기 때문이다.  

/전민일보 칼럼 기고문 예산군농업기술센터 장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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