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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창의 생애와 시혼(詩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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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창의 생애와 시혼(詩魂)
  • 전민일보
  • 승인 2023.02.01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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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변산은 산·들·강 바다가 어우러져 천혜의 광광자원이 풍부하여 변산반도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 30여년이 지났다. 넓은 평야는 비옥하고 산림자원과 서해바다를 접한 반도로서 물산(物産)이 넉넉하여 예부터 생거(生居) 부안으로 불리어왔다.

매창은 부안이 낳은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이다. 그는 1573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났다. 그때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이라고 불렀고, 자는 향금, 기생이 된 뒤에는 애칭으로 계낭(癸娘)이라고 불렸다. 매창(梅窓)이란 호는 본인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매창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열두 살이 되어서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니 천하 고아가 되어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기생이란 설도 있었는데, 아전과 기생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순수하게 기생이 될 교육을 받았다.

명기(名妓)가 되려면 기생청(妓生廳)에서 기생수업을 받아야 한다. 오죽하면 기생청이란 기관을 두었을까!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 성천의 김부용 등은 기생수업을 받아 시·서·화·가·무·음곡으로 명성이 높은 기생이 아니던가! 지금은 정읍에 권번예술문화원(기생청)을 운영하며 옛 기생교육을 재조명하고 연극으로 예술성 높게 운영하고 있다.

매창은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고 전하여지며, 머리가 명석하여 시문과 거문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익혔다고 한다.

매창은 출신성분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생이 되었다. 그러나 기생이라 해서 자기의 몸을 함부로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절개가 곧았다. 술 취한 사람이 매창을 건드려 보려고 갖은 수작을 부렸으나 그는 즉시 거절하며, 즉흥시를 지어 쫓아냈다고 한다.

매창은 탄금에 능할뿐더러, 어려서부터 천부적 서정 시인으로 명성을 날린 기녀였으니, 전국의 풍류객들이 그를 만나러 줄을 섰다고 한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만큼 매창에게 집적거리는 뭇 남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반박하는 시문과 슬기와 재치로 이성의 벽을 넘겨버렸다.

매창이 마음을 주고 즉흥시로 화답하며 시문을 주고받은 남자로는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다. 유희경은 비록 천민이었지만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영의정까지 오른 박순을 비롯해서 많은 양반 사대부들이 그와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사랑에 겨워서 주고받은 시들이 많이 전한다.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유희경은 서울로 돌아갔다. 매창은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은 날로 더해갔다. 더군다나 임진왜란동안 의병을 일으키느라 경황이 없어 편지도 띄우지 못했다. 유희경을 애타게 기다리던 매창은 한스럽고 애절한 시를 남겼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유희경이 매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다.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살아가던 기생 매창에게 다시 남자가 나타난 것은 이웃 고을 김제 군수로 부임한 묵재 이귀(李貴)이다. 글제주가 뛰어난 명문 집안의 출신 이귀에게 매창의 마음이 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기록은 없고 이귀의 후배였던 허균의 기행문에서 매창을 이귀의 정인(情人)이라고 표현한 것만이 남아 있다. 이귀가 김제 군수의 직에서 파직되어 떠난 뒤에 매창은 허균(許筠)을 만났다. 허균은 매창을 처음 만나 시문으로 화답한 날로부터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글과 가무, 음곡으로 즐겼지만 밤이 되니 매창은 조카딸을 보낸 것으로 보아 육체적 사랑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벗 이귀의 애인이었으므로 잠자리를 사양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허균이 공주목사로 복무 중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는 예전부터 은둔하려고 눈여겨보아 두었던 부안현 우반동 골짜기로 들어가 쉬었다. 그 뒤 중국 사신을 맞으러 다시 서울로 갔다. 그곳에서 매창을 그리워하며 즐겼던 추억의 절절한 편지를 보냈다. 그게 마지막 편지다.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편의 추모 시를 써주었다.

매창은 태어나 혈육 하나 없이 오직 기생의 삶으로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가 부안읍 봉덕리 공동묘지에 묻힐 때 즐겨 뜯던 거문고를 함께 묻어줬다. 그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불렀으며 그가 죽은 뒤 45(1655)년 만에 무덤 앞에 명원 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란 비석을 세웠다.

매창의 생전에 수백편의 시를 지었다지만 많이 없어지고 그때까지 부안 고을의 아전들이 전해 외웠던 58편을 모아 주옥같은 《매창집》을 발간하였다. 그 매창집은 서울의 《간송문고》와 하버드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매창은 죽어서까지 어떻게 시문이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의 여류문학을 빛내고 있는지 희귀한 일이며, 한편으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년 4월이면 ‘매창문화제’를 개최하고 백일장, 연극, 가무, 음곡 등으로 고인의 시혼(詩魂)을 승화하는 대대적인 문화행사를 군민들의 사랑으로 열린다.

매창기념사업회에서 부안 성황산 기슭서림 공원에다 매창의 시비(詩碑)를 세웠(1974)다. 시비 옆에는 혜천(惠泉)이란 조그만 옹달샘이 있다. 혜천은 매창이 생전에 즐겨 마셨던 샘물이다. 그 물을 마시고 시상이 떠올라 명시를 창작하였으리라!

이제 시인은 간곳없지만 부안인의 매창사랑은 4백여 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로 오늘도 변함없이 풍풍 솟아나고 있다.

고재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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