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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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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남자
  • 전민일보
  • 승인 2022.11.03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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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처처에 내려앉았다. 여문 햇살 한 줌이 뜰 앞 감나무 잔가지에 걸려 있다. 갈색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린 햇살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헤맨다. 바람이 흔드는 빈 가지 사이로 조각구름이 흐른다. 
뜨는 해나, 지는 해가 신비하게 열어 놓은 빛의 스펙트럼은 황홀한 우주쇼다. 하늘은 청옥처럼 맑고 투명하다.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그리움이란 애타는 마음이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지고 싶지도 만질 수 없는 것. 그래서 그리움은 감옥이다. 감옥의 독방 같은 것이다. 독방에 갇혀 처절하게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 그리움은 깊게 파인 마음의 상처를 봉합할 수 없는 상태, 그 아픔을 참고 견디는 일이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다. 오래 정들었던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함께 하지 못하고 서로 헤어진다. 이다음 봄이 되면 새잎을 틔우겠지만 한 해 동안 한 나무에 붙어 있던 잎과 가지가 영영 만나지 못한다. 이런 탓인지 연인들이 가을에 가장 많이 이별한다는 통계가 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생명이 쇠락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없는 사람은 감정이 무딘 사람이다. 사색은 공부이다. 고로 가을은 공부의 계절이다. 인생 공부, 삶 공부, 죽음 공부, 사랑 공부, 철학 공부 등…….
 가을은 바람의 계절이자 낙엽의 계절이다. 가을바람은 두껍고 매섭다. 나뭇잎들이 오색으로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가을은 공허하고 애달픈 계절이다. 가을은 고독과 친하다. 가을은 비애의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외로움은 인간의 생명을 끊임없이 마모시킨다. 그러나 생은 필연적으로 공허하고 고독하다. 
 나는 가을만 되면 마음이 헛헛하고 우울하다. 메마른 낙엽처럼 기분이 뚝 떨어진다. 
 어느 늦가을이었다. 거리엔 낙엽들이 제멋대로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갈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밤색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박 차박 차르르르. 주의를 돌아보다가 어느 벤치에 앉았다.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 벤치 주변에 낙엽이 우수수했다. 내 머리에도 옷에도 비 맞은 가을이 내려앉았다. 마음은 엉킨 실타래처럼 심란했다. 센티해진 마음을 추수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이 세상 고뇌를 다 짊어진 듯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골똘히 사념하게 되었다. ‘고뇌는 인간의 벗’이라고 말한 쇼펜하우어가 생각났다. 쇼펜하우어는 불행이라는 장애물이 나타나야 인간은 비로소 살맛이 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삶과 죽음을 선고받은 죄수가 아닌가.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지독히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말이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외로움만이 기다리는 디스토피아다. 결혼도, 우정도, 결국 본질적인 고독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는 욕망이 있으면 채우지 못하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욕망이 없으면 욕망이 없음으로 인해 삶의 무의미에 시달리는 것을 기본적인 인간의 속성으로 파악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욕망을 부정하는 금욕이다. 그리고 그는 이성 철학을 거부하고 세계를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파악하려고 했다. 
 다시 가을이 왔다. 가을이면 기분이 울적해진다. 공연히 눈물이 나기도 하고, 안절부절못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고, 누가 기다리지 않아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싸늘한 기운 스며드는 가을밤, 잠자리에 누우면 몸은 천근만근, 마음은 천 길 만 길 낭떠러지로 구른다. 
 가을바람이 분다. 가을바람은 잊혀진 이름과 얼굴들을 불러온다. 주위를 돌아본다. 나 홀로 가을 한복판에 서 있다. 나는 가을 속에 파묻혀 있다. 내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가을도 울고 나도 운다. 
 갑자기 가을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래도 괜찮아, 산다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신영규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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