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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청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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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청자박물관
  • 전민일보
  • 승인 2022.09.1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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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을 닮았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고 행복한 기운을 느낀다. 고려청자를 보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에 이끌린다.

나는 간혹 내 고향 부안에 있는 고려청자박물관을 찾는다. 천년 숨결을 간직한 고려청자는 우리 선조들의 높은 과학기술과 문화적 역량,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안 청자박물관은 2011년 4월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에 고려청자의 보존과 활용을 목적으로 개관했다. 1종 청자전문박물관으로 진품 유물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 등, 체험이 가능한 체험동 가마터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야와 사적 공원 등이 있으며, 가마 보호 각 2동, 도예창작스튜디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장품은 중요 유물 2백여 점과 학술연구자료로 발굴 출토된 유물 10여톤이 있다.

부안 변산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려청자 가마터 중에서도, 보안면 유천리 일대의 가마들은 가장 뛰어난 수준의 순청자와 상감청자(象嵌靑瓷)를 구워내던 곳이다.

약 40여개소 유천리·우동리·진서리에 이르는 이곳의 가마터 가운데 11세기 말과 14세기 초의 것들도 있으나 대체로 고려청자의 최전성기인 12세기 중 후반의 것이 가장 많으며, 약 1백5십년 정도 도자기(청자·백자)를 다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청자요지는 사적69호, 진서면 진서리 정자요지는 사적 70호로 지정돼 있다.

부안 변산의 유천리 고려청자의 산지로 유명했던 것은 지리적 환경이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고장이다. 부안지역은 흙과 물이 좋고 나무가 울창해 땔감이 풍부하여 양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서해 뱃길을 따라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각 고을로 운송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두루 갖춘 최적의 지역으로 여겨진다.

진서리 도요지는 퇴적층이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도굴되어, 최전성기의 우수한 파편을 간직한 가마터들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밖에 찻길 북쪽 야산기슭에도 가마터가 있었지만 농경지로 변화되고 찻길 남쪽 붉은 흙 둔덕에 안내판과 사적비만 있을 뿐이고, 바닷가 쪽에 밀집한 가마터들은 사과밭이나 잔솔밭으로 바뀌었다. 옛 선인들이 이룩한 도자기문화의 원활한 전승이 미흡한 점 아쉽기만 하다.

부안은 전남 강진과 함께 고려시대 청자의 본산지로서 고려사회의 안정과 더불어 요업이 활성화된 지역이다. 부안청자 가마터는 1960년대부터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고, 부안 가마터출토 자기편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대량 소장되어 있다.

부안의 청자와 백자가 1980년대의 특별시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일반사회에 홍보되었다.

청자의 기형이나 양식, 문향도 매우 다양하다. 대접, 접시, 항아리, 병, 잔, 찻잔, 베개, 향로, 불상, 바둑판, 필세, 매병, 종, 화분, 합, 기름병, 주자 등 거의 대부분의 기형을 망라해서 그런 수준이다. 또한 음각, 양각, 상감투각, 철화 등의 방식으로 국화, 모란, 운학, 수금, 인물, 연화, 석류 등 수없이 다양한 문향들이 시문되었다.

고려시대 부안지역에서 생산한 고려자기를 개성으로 옮겨가던 중 부안·군산 앞바다에 가라앉았다가 어부들에 의해 인양 신고된 적이 있다. 인양된 유물 1백여점은 20~40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백운거사라’는 호를 쓴 고려의 유명한 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32세(서기1199년)에 전주 목사록에 임명돼 서기를 겸하는 관직을 받아 전주목(全州牧)에서 근무하고 떠날 때 시문 외에 전라도 지역의 기행문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남겼다.

그가 남긴 글 중에는 생활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글들이 많은데, 특히 부안 고려청자에 관해 남긴 시문에는 비색(翡色)을 지닌 청자(靑磁)에 대해 생산과정과 당대의 높은 수준을 찬(讚)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규보가 청자에 조예가 깊은 것은 부안 변산에서 왕실의 재목을 관리하는 관직을 지낼 때, 산지에서 제작과정을 살펴보고 안목을 넓혔고, 그 심정의 찬사를 담은 듯 싶다.

부안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고려자기 생산지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채 7백여년을 내려오다 19세기에 들어서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6년에 발간된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 문헌에는 유천리·진서리 지역에는 길바닥에 반짝거리는 것이 모두 고려청자의 파편임은 어찌할찐지, 등의 고려자기 생산군집지로 극찬의 찬문을 남겼다.

부안과 강진은 고려시대 자기의 역사를 이끌어 간 두 개의 축이라 할 수 있다. 부안 일대 여러 곳에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으나, 유명한 곳은 유천리와 진서리이며, 유천리 37개 진서리 38개의 가마터가 발굴 조사되었다.

가마터의 수는 비슷하지만 가장 세련된 자기를 대량 생산한 곳은 유천리이다. 청자가 95% 이상이고 백자는 3%미만이지만 백자의 양식이 매우 세련되고 독특하며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희귀한 양식도 보인다. 따라서 부안 자기의 대명성은 당연‘유천리’자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안 청자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11~14세기 정치·경제·사회·문화와 생활상이 어려운 시대였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우수한 도자기를 생산한 그 선인들의 장인정신에 존경을 표한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부안 변산의 명성이 천년 역사에 반짝거리는 비색 청자와 더불어 길이 빛나리라…….

고재흠 수필가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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