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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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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죽음
  • 전민일보
  • 승인 2022.07.25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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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한 개인의 죽음이 사회와 역사에 커다란 변곡점을 가져온다.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 성왕(成王), 고려 공민왕(恭愍王) 그리고 조선 정조(正祖)의 죽음이 그렇다.

이들의 퇴장은 그 형태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당대를 넘어 이후 역사흐름을 규정하는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바꾼 죽음, 여기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신라 장보고(張保皐)다.

조선의 쇄국정책을 떠 올리면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9세기 초 신라는 대외 활동이 활발했다. 코리아타운의 원조도 신라방(新羅坊)이다. 또한 청해진(淸海鎭)은 당시 동아시아 인적 물적교류의 허브였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당시 세계관을 감안하면 현재의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가진 위상과 비슷하다.

실제로 청해진에서는 신라 정부와 별개로 독자적인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런데 장보고가 암살당한다. 장보고가 사라진 청해진은 이후 더 이상 국제교류의 허브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장보고는 왜 죽어야 했을까?

장보고는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러 찾아 온 김우징(金祐徵)을 각별하게 살펴주는데 그가 후일 신무왕(神武王)이다. 신무왕은 장보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과 장보고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약속한다.

문제는 골품(骨品)으로 이뤄진 신라 사회 기득권층의 강고한 저항이었다. <삼국사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왕 8년(846) 봄에 청해진(淸海鎭)의 궁복(弓福)이 왕이 딸을〔차비로〕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장차 그를 토벌하자니 예측하지 못할 환난이 생길까 두렵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어서, 우려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신라 귀족들은 자신들과 신분적 차이가 있는 장보고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장보고가 가진 무력 앞에서 당황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염장(閻長)이다. 그는 자신이 장보고를 처리하겠다며 이렇게 호언한다.

“조정에서 다행히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신은 한 명의 병졸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김우징을 잘 대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보고는 자신을 찾아 온 사람에 대해 아무런 꺼림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염장의 교묘한 속임수에 속은 것도 그 때문이다.

염장은 술에 취한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그 목을 베고는 장보고 부하들을 장악해 버린다.

그런데 장보고가 죽은 시기에 관해 일본 측 사료는 다른 얘길 하고 있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842년 1월 10일 기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들은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841) 11월 중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는 까닭에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

장보고로부터 도움을 받은 바 있던 사람 중엔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도 있다. 그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회창(會昌) 5년(845년) 7월 9일자 기사도 앞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거기엔 장보고의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로 활약하던 전청해진병마사 최훈(崔暈)이 국난을 만나 신라방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죽은 시점에 대해 <삼국사기>보다 일본 측 사료의 신빙성이 더 큰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보고가 죽은 해가 841년과 846년 중 어느 것인지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장보고가 단지 신라에 국한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장보고의 죽음은 신라 보다는 중국과 일본에 더 깊은 충격과 변화를 초래했는지 모른다. 장보고 사후 한국사에서 바다는 그 중요한 의미를 상실한다.

한국사에서 장보고와 같은 또 다른 인물이 나와 바다를 경영할 수 있었다면 그 이후 진행된 한국사의 방향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장보고의 최후를 보며 오늘 묻게 되는 것이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장보고를 다양한 방법으로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찾지 못한 그 과오는 훗날 후손들이 평가할 것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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