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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생애와 시혼(詩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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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생애와 시혼(詩魂)
  • 전민일보
  • 승인 2022.07.1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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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송도가 낳은 여류시인·명기이다. 그는 부안의 이매창(李梅窓)·평안도 성천(成川)의 운초 김부용(雲楚金芙蓉)과 더불어 조선시대 때 3대 여류시인 여기로서 그중 최고의 명성이 높은 여류시인이다.

또한 명석한 두뇌와 특출한 재능으로 시·서·화·가·무·음곡으로 당시 많은 시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황진이는 기녀가 아니라 시인으로 시문학계에서는 더욱더 찬사를 받는 인물이다. 법도에 짓눌려 물체처럼 살다간 여인이 아니라 뜨겁게 자신을 태우고 간 불나비 같은 멋진 여인으로 각인된 시인이다.

내로라하는 남정네들이 맥을 못 추고 그녀의 손에 잡혀지기를 기다리는 형국은 상상만 해도 어깨춤이 절로 나는 유쾌지사가 아닐 수 없다. 서화담 하나쯤 못 꺾었으면 어떠랴. 아니 그것도 꺾였는지 아닌지는 서화담 한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마음속 싸움에서 졌으면 꺾인 것인지 꺾이는 게 뭐 별것이겠는가.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오신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위 시는 오늘날까지 최고의 명시로 평가되고 있다. 밤을 자르고, 달려 내려가는 계곡 물살을 잡아 두려 한 발상, 이건 기발이라는 말로 설명이 어려울 정도다. 소망을 형상화했음도 알고, 벽계수는 여인을 직설적으로 회자하고 있음도 잘 알 수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님을 그리는 뭇 여인이 이렇게 읊어내지 못하거늘, 유독 그녀만이 이런 엄청난 발상을 심상하게 시로 토해내고 있음이 바로 범상치 않음이다. 자신을 진솔하게 토해내며 투명하게 살다간 여자의 감정에 인색하지 않게 충실한 삶을 살았지만 치정이나 욕정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 멋진 여자, 귀재에 속할 수밖에 없는 시인으로 기억되는 여자, 내게 있어 황진이는 그런 여자가 아닌가 싶다.

도무지 흉내낼 수 없어 더 좋고 따라갈 수 없어 흠모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여자 황진이로 오랫동안 기억되리라.

여자로 태어난 죄를 머리에 이고 널뛰기로나 울밖을 볼 수 있었던 기막힌 세월을 보내면서 일생을 깎아 먹던 시절에 온 천하를 주유하고 일어나는 시심을 그대로 쏟아내 글을 지어 써갖고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흐르는 물에 띄워버리는 엄청난 황진이, 어느 모로 생각해도 잘난 여자다.

조선시대 여류문장으로 허난설헌과 사임당을 꼽지만 사대부집 울안에 타고난 재주를 많이 잠재울 수밖에 없어 안타깝고, 그녀들에게는 멋은 떠올릴 수 없다.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 등은 훌륭한 기생으로, 의기(義妓)로서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다.

글만 읽다가 죽는 사대부들과 시문을 논하고 가슴을 열어 지성과 낭만을 마음대로 오가게 하는 소극적 수준을 넘어, 탁월한 시문으로 뭇 남정네들 부처님 손바닥에 손오공 놀 듯 만들었다면, 또는 요즘 사회라면 가히 노벨상감이 아니겠는가!

또한 자기를 쳐다보며 홀로 가슴 태우다 상사병으로 죽은 이웃집 총각이 끝내 속적삼을 가슴에 얹고서야 상여발을 떼게 했다는 이야기의 지위야 여하간에 훗날의 황진이를 보면 그 총각의 눈에 혜안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양반의 첩실 몸에서 태어난 아까운 재주꾼이었다는 이야기도 정설은 아닌 듯 싶지만 아주 엉뚱한 상상만도 아닐 듯 싶다. 그만한 재주가 글하고는 담 쌓고 사는 서민의 핏줄에서 찾기 힘들지도 모르기에 말이다.

황진이(黃眞伊)는 조선시대 중종·명종·선조 때의 명기(名妓)로서 자(字)는 명월(明月), 별명은 진량(眞娘), 재색(才色)을 겸비한 시기(詩妓)이다. 한시와 시조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으며, 서경덕(徐敬德)·박연폭포와 아울러서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자칭하기도 했다.

또한 개성을 상징하는 두 인물은 정몽주와 황진이다.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이라면 황진이는 여류시인·여기(女妓)의 상징이다. 두 인물은 대비적인 삶을 살았다. 고려말의 정몽주는 학자·정치가로 고려왕조를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충절의 꽃이라면, 조선시대 황진이는 억압과 신분차별을 극복하여 자유분방한 삶을 누리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 여류시인이었다. 시인이기 전에 기생의 꽃으로 발자취와 향기를 남겼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은 억압과 강요된 도덕률 속에 짓눌려 있었다. 황진이는 여성에게 가혹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기생의 신분으로 탁월한 시재(詩才)와 기질을 유감없이 떨쳐 사랑과 아름다움을 보여준 꽃이라고 할 수 있다.

5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수준 높은 시혼은 살아 있다. 그녀는 분명 명인이다. 무덤을 덩그러이 쓰지 말고 만인간의 발길에 밟힐 길섶에 이름 모르게 묻어달라고 한 것도, 본인 회한이나 참회로 해석들 하지만 그 또한 멋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고재흠 수필가

※본 기고는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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