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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72주년...소외되는 6.25 참전용사 上] “오직 조국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 뿐”...손양기 참전용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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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72주년...소외되는 6.25 참전용사 上] “오직 조국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 뿐”...손양기 참전용사 인터뷰
  • 이정은 기자
  • 승인 2022.06.22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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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0살에 독립기갑연대 입대
무전통신 상급기사로 전투 참여
수색 명령 수행 중 공격 받아 부상
“참전 용사들의 희생 기억해주길”

 

올해로 한국전쟁이 72주년을 맞았다. 70여년 전 한국 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무고한 희생으로 후손들은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울려퍼지는 포성과 고통의 연속이였던 동족상잔의 비극은 후손들에게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조국을 위해 맹렬히 싸운 영웅을 만나 전쟁 당시의 참혹함과 함께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세상을 불행하게 태어나서 군대에 들어가서 전쟁을 치를 수 밖에 없었어요"

무전통신 상급기사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손양기 선생. 올해 94세의 나이지만 아직도 눈만 감으면 70여년 전의 끔찍했던 전쟁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한다.

1949년 3월 11일, 익산에 살던 그는 서울에 있는 일제 시절 일본군의 막사로 쓰였던 육군 독립기갑연대에 입대했다.

1대대 장갑대대에 속해 있었지만 그 당시 부대의 장갑차는 27대가 전부. 이 또한 2차 대전 당시 미군들이 쓰고 폐기처분한 장갑차였기에 북한군에 비하면 한국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 30분에 출동 명령을 받았어요. 한강 철교를 경비하라고 무전을 받았어요. 그 당시에는 한강 철교가 하나 밖에 없었는데 전쟁 중에 그 마저 끊어져 버렸어요"

그날 오후 4시 30분께 김포로 가서 수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장갑차 한대에 장교 1명, 포수 1명, 통신병인 나와 함께 운전병 이렇게 넷이 타고 갔어요. 앞을 보고 긴장해서 가는데 자꾸 장갑차가 옆으로 가는거예요"

이상함을 눈치챈 그는 옆에 앉은 운전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운전병이 북한군의 공격에 당한 것이다.

"옆을 보니 운전병 얼굴이 반이 나가 있어. 피를 철철 흘리면서. 근데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게 죽는 그 순간에도 핸들을 놓지 않아. 핸들을 손으로 꽉 쥐고서 악을 쓰면서 버티고 있는거지"

장갑차가 공격을 받자 장교와 포수, 그리고 손 선생은 죽기 살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앞쪽 산에서 이쪽으로 와! 이쪽이야! 하면서 한국말로 나를 부르는데 한국군인가 하다가 순간 느낌이 이상한거예요. 산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니 그제서야 옆으로 총알 소리가 휙, 휙 나더라구요. 먼 거리라 다행히 맞진 않았지"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그는 기지를 발휘했다. 옆에 보이던 수박 밭으로 향해 밭 고랑사이를 파고 누워 수박 넝쿨로 온몸을 뒤덮고 엄폐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태양을 보고 누웠던 그는 눈을 떠보니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고단함에 잠들어 버린 것이다. 잠에서 깨자 옆에는 고요하지만 빠르게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민들 사이에 섞여 그렇게 목숨을 건졌다.

영등포까지 걸어 온 그는 헌병대의 도움으로 부대로 복귀한 뒤 포탄으로 인한 부상을 치료 받기 위해 부산 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원으로 가면서 생각했어요. 아, 그냥 익산 집으로 도망가버릴까. 근데 이 생각도 잠시였어요. 내가 조국을 지키지 않으면 가족들도 못지키는 거예요. 죽더라도 내가 군대에서 죽자 생각했죠"

부산 병원에 도착한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병원에 들어서니까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울부짖는거예요. 살려달라고. 여기저기서 살려주세요, 울음이 터져 나와. 두 다리가 잘린 사람도 있고. 팔이 하나 없는 사람도 있고. 수용이 안되니까 그냥 병원 바닥에 누워있어"

손 선생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참혹했던 그 당시가 떠오른다고 한다. 겨우 치료를 받은 그는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가 부대로 복귀했다.

전쟁 당시 밤잠을 설쳐가며 무전을 받았다는 그는 전쟁 당시 3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북한군들이 들으면 안되니까. 모스 부호로 무전이 오거나 일본어나 영어로 무전이 왔어요. 이렇게 문장으로 오는 것도 아니고. 'ㅎ,ㅏ,ㄴ, 이렇게 따로 오니까 다 조합을 하고 또 무전을 해석을 해서 보고하고. 1949년에 교육 받고 전쟁에 그냥 나간거지“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는 그는 영하 30도의 날씨에 북한의 나진지역까지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군화 밑창이 구멍이 날 정도로 끝없이 걸었지만 중공군의 투입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동료 중 한명이 이제 막 결혼해 아들을 낳았어요.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아들 사진을 꺼내 봤지요. 수도고지전투 이후에 집에 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은 상태였는데, 결국 그 친구는 영원히 집에 갈 수 없어요. 전사를 한거죠. 그 친구만 생각하면 내가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전쟁의 참혹함에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그는 "결국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효심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결국 나라를 위한 효심이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국심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고 말하며 후손들이 애국심을 길러주길 당부했다.

이처럼 전쟁의 아픔을 겪은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불편한 진실은 존재했다.

참전 용사들의 처우가 여전했기 때문이다. 손 선생은 "참전 용사들은 한달에 35만원을 받아요. 훈장이나 받아야 8만원 추가 된다고 합니다. 나는 한달에 41만5000원 그렇게 받고 있어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목숨값이 40만원이예요. 참으로 씁쓸하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어쩌겠어요. 90이 넘은 나이에 국가에서 주는 수당으로나마 생활할 수 밖에 없지요”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손양기 선생은 참전용사들의 대한 열악한 지원탓에 무공수훈자회를 창설했다.
단체를 통해 여러 지원을 받아 참전용사들을 돕고 있다. 또 태극기달기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후손들에게 잊혀져가는 한국 전쟁의 의의를 되새기고 있다. <계속> 이정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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