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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고전 반열에 오른 '시계태엽오렌지' 증보판 번역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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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고전 반열에 오른 '시계태엽오렌지' 증보판 번역본 출간
  • 김영무 기자
  • 승인 2022.05.1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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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는 1962년 영국에서 발표된 이래 끊임없는 논란과 열광을 낳으며 20세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이 소설은 외부의 힘에 의해 태엽이 감겨야 움직일 수 있는 인간상에 대한 반성을 제시한다. 폭력과 죄악에 대한 성찰 속에서 국가 권력의 억압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옹호하는 이 작품은 당대의 속어와 신조어를 과감하게 차용하고 서술 형식에 음악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소설 기법 면에서도 일대 혁신을 이루어 냈다. 이 책은 『시계태엽 오렌지』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에 나온 증보판을 번역한 것으로, 편집자 주석, 은어 사전, 앤서니 버지스의 에필로그와 여러 편의 에세이, 미출판 인터뷰, 1961년 타자본 등과 맬컴 브래드버리, A. S. 바이엇 등 작가들의 리뷰 등을 부록으로 실어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하고 논쟁적인 주제는 등장인물 중 작가 알렉산더와 교도소 신부의 말 속에서 반복된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 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일 수 없으며 다만 태엽 달린 오렌지처럼 수동적인 기계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성원들의 선택과 동의 없이 실행되는 모든 사회적 결정은 원천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유 의지의 무조건적 긍정은 주인공 알렉스의 무차별적 폭력의 자유와 맞물리며 보다 첨예한 문제의식을 요구한다. 버지스는 알렉스가 저지르는 폭력과 공동체에 미치는 해악의 강도를 극단화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폭력의 자유까지 인정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버지스는 선과 악, 그리고 자유의 한계라는 통념을 모두 거스르는 인물로 알렉스를 설정함으로써, 자유와 윤리에 대한 상식적인 논리의 구도를 깨뜨리려 한다. 알렉스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아직 열다섯 살에 불과한 미성년자이며, 자신의 행위의 영향이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또한 대중문화의 사회 통제적 속성에 반감을 갖고 있으며 고급문화의 향유자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선인도 악인도 아닌 미성숙한 인물, 모든 통제에 반대하며 절대적인 자유를 원하나 그 자유의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는 완벽한 반항아로서 알렉스는 윤리적, 문화적, 세계관적 자기모순에 빠진 현대인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

현대인에게 선과 악이란, 그것이 종교적인 덕목이든 공동체의 규범이든 법적인 규칙이든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자유 의지 또한 선이나 악 어느 한쪽으로 정향(定向)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 어떤 강요나 억압이 가해질 때, 즉 순수한 개인의 선택이 아닌 경우, 그것은 인정될 수 없다고 버지스는 역설한다. 작품의 배경인 미래의 런던은 온갖 범죄가 난무하며 이에 맞서는 사회 통제 또한 범죄의 강도에 못지않은 폭력성을 지닌 암울한 디스토피아다. 학교나 교도소 등의 국가 장치는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며, 오직 순응적 인간과 비순응적 인간을 격리하는 데 주력할 뿐이다. 알렉스의 폭력성과 비규범성이 이러한 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체포된 후 겪는 교도소 생활은, 환경적 요인으로써 인간의 심성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무용함을 보여 준다.

알렉스가 자원하여 받는 루도비코 요법은, 인위적인 실험을 통해 인간의 범죄적 속성을 통제하려는 환경 결정론의 극단화된 형태다. 피실험자는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빼앗긴다. 버지스가 보기에 이와 같은 환경 결정론의 오류는 죄악의 근원을 따져 보려는 사고방식이 일종의 무균질 인간이라는 허구를 전제하고, 한 인간이 겪는 복잡다단한 삶의 이력을 통제하거나 변형할 수 있다는 인위적 시술의 가능성을 상정하는 데 있다. 버지스가 교도소 신부의 입을 빌려 펼치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모순적인 주장은, 무엇이 좀 더 인간적인가라는 반문이며, 그 토대 위에서 개인의 삶과 공동체 조건의 개선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악의 근원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인간적 진실의 질문, 즉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점차 박탈되어 왔으며, 현대에 들어와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데 있다. 신화와 종교, 사회적 기제라는 외부의 권위와 위협 속에서 한 개인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반성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어 왔다. 특히 사회 통제의 장치가 고도화되고 대중 매체의 영향력은 절대적으로 커져, 사유하고 반성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제목 그대로 태엽 장치를 달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주체적인 반성의 능력을 잃어버리면서, 윤리와 도덕에 대한 의식 또한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러한 조건이 곧 죄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김영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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