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0 18:25 (토)
평화와 중립에 대한 오해
상태바
평화와 중립에 대한 오해
  • 전민일보
  • 승인 2022.03.23 0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국의 전설적인 권투 챔피언 카오사이 갤럭시(본명 수라 샌캄)가 취객에게 봉변(?)을 당해 뺨이 찢어진 적이 있다. 갤럭시는 현역시절 유명한 한국 선수를 비롯해 수많은 철권(鐵拳)들을 K.O.로 눕혔는데 그 장면을 TV로 봤던 나는 아직도 그의 강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그가 취객에게 뺨을 맞으면서도 주먹을 휘두르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가 왜 위대한 챔피언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여유와 관용 그리고 평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

갤럭시에게서 떠올리게 되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청백리(淸白吏)다. 청백리가 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의 힘과 권력을 이용해 부(富)를 이룰 수 있음에도 그것에 초연한 인물이 바로 그 대상인 것이다.

한국인을 정의하는 말 중에 ‘평화애호민족’이 있다. 과연 한국인은 그러한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평화는 그것을 깨트릴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평화를 지키는 자에게 해당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국사에서 과연 그런 경험을 가진 세대가 언제인가?

힘이 없어서 침략을 당하는 대상이 ‘우리는 평화를 소망한다.’라고 외친들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평화에 대한 호소가 아닌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구걸의 거의 대부분은 참담한 결과로 귀결한다.

한국을 둘러싼 주변국 일본과 중국에 대해 한국은 자신의 힘을 제어할 필요성을 느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일본과 중국이 한국에 대해 했던 것처럼 그들을 침략해 파괴하고 굴복시킬 능력을 보여준 것이 언제인가? 만일 한국이 그런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평화애호에 대한 신념과 의지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평화의 모습이다.

평화에 대한 개념 규정은 그것대로 잠시 유보해두자. 백번을 양보해 구걸을 통한 현상유지도 평화라고 한다면 그것을 유지 존속시키기 위한 방안은 과연 무엇인가? 강자들 사이의 중립(?).

구한말 주변 열강의 침탈을 벗어날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중립화론이다.

그런데 결과가 말해주듯 강자는 약자의 중립을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명(明)과 청(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광해군(光海君)은 중립외교를 펼쳐서 평화를 유지했고 인조(仁祖)는 중립을 훼손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참화를 불러왔다는 신화는 정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쟁투를 보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그때를 얘기한다. 그 바탕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균형외교론이다. 미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중국과 선린우호 관계를 가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모두의 친구는 아무의 친구도 아니다. 한국이 제 아무리 주변열강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들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한국사의 지나온 모습이 그랬다.

그들에게 우리가 어떤 호소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가치와 존엄을 지켜나갈 수 있는 현실적인 힘과 그에 부합하는 동맹이 필요하다.

요소수 파동을 놓고 나온 논리는 일본의 수출규제 때 나온 그것과 너무도 상반돼 놀랐다.

여전히 책봉 받고 조공하며 지내는 것이 한국의 생존법칙이란 얘기는 그래서 자연스럽다.

한국이 중국에 뭘 일방적으로 받았단 말인가? 중국은 한국의 도움 없이 오늘을 만들었나?

중국은 한국에 균형외교를 요구한다. 그것에 동조하는 자체가 이미 중립이 아니다. 민주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통일한국의 지향성 그리고 상호존중이라는 핵심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들이 함께 해야 할 대상이다.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한국에 도래할 공포를 말하는 그들은 평화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북경에 모인 중국 군부 실력자들 앞에서 중국의 잘못된 정책을 매섭게 비판하는 베트남 군 장성의 모습, 그것이 바로 평화와 중립을 얘기할 수 있는 당당함이다.

전승국(戰勝國) 고려가 송(宋)에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다. 그 시기가 한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이 주도적으로 동북아 평화를 얘기할 수 있었던 때다. 평화와 중립은 그렇게 실현된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신천지예수교 전주교회-전북혈액원, 생명나눔업무 협약식
  • '2024 WYTF 전국유소년태권왕대회'서 실버태권도팀 활약
  • 이수민, 군산새만금국제마라톤 여자부 풀코스 3연패 도전
  • ㈜제이케이코스메틱, 글로벌 B2B 플랫폼 알리바바닷컴과 글로벌 진출 협력계약 체결
  • 맥주집창업 프랜차이즈 '치마이생', 체인점 창업비용 지원 프로모션 진행
  • 스마트365잎새삼, 스마트팜을 통해 3년간 확정 임대료 보장